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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본문 /  눅16:1-13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를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맡기신 것이 언제까지나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며, 지금 보이는 세계가 사라지면 감추어진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날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기지 직분을 빼앗길 때가 반드시 있음을 알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주인의 것을 허비한 세월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충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그 뒷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 탕감하기

오늘 본문의 청지기는 자기가 할 일을 이렇게 정하였습니다. 바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이 맡고 있는 재물이 축나는 일이요, 맡기신 주인의 것이 축나는 일이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주인의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청지기는 이제 주인의 꾸지람보다는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자기 친구를 만들어 두는 일이 더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주인이 맡기신 재물은 종이 주인의 뜻대로 쓴 만큼 주인에게 충성한 것이고, 남겨서 가지고 가는 만큼 주인에 대하여 불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23-35) 물론 이것은 용서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보면 주인에게 빚진 자가 나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이신 그 분이 갚을 것 없는 우리를 다 아시고 다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탕감에 대해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과 생각은 주인의 원하심이 아니라 육체의 본성적인 삶이며 사고입니다. 육체적으로도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자식이 돈을 많이 벌어다 용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님이 원하시는 훌륭한 자식이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하게 은혜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어떤 기독교적 형태의 사역을 많이 하는 것도 좋겠지만 더 바람직 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바르게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종 된 우리의 사역 중 제일 중요한 사역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4-17)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시고, 특별히 바르게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세족식은 단순히 발만 씻겨 주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셨던 그 지경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먼지가 많은 나라고 또 그 당시 신고 다녔던 신발이라는 것이 거의 샌들 형식의 신발이었습니다. 몸의 다른 부분들은 거의 다 먼지 때문에 많이들 가리고 다녔지만 발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에 자신이 의지와는 관계없이 더러워 질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마치 우리의 본성과 같은 것입니다. 본성은 우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우리 안에서 불쑥 나오는 것입니다. 그 본성적인 삶이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욕했다는 말씀은 이미 주님을 영접한 자들을 말하고 그들 까지도 발이 더러워 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심으로 아무리 믿어도 우리의 본성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우리의 책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 발을 씻어 주라고 하십니다. 발이 더러우면 내가 씻으면 되지 뭐 하러 서로 씻어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본성으로 더러워지면 자기 자신은 더러워 졌다는 사실을 거의 잘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씻어주기 전에는 보지 못하고 늘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발을 씻겨줘야 하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본성적으로 주님께 갚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갚기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려 줘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진정으로 갚기를 원한다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으로 따지자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을 때 그 땅을 약속으로 다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성적인 삶인 아말렉을 진멸하지 못하면 가나안 땅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라는 곳을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허락 받았지만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광야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가나안을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 아닙니다. 허락 받았지만 오늘 말씀처럼 하면 아직도 주님께 빚 진 게 많아 내가 뭘 해서 갚아 한다고 생각하는 본능적인 삶,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이 더러워졌으나 그것을 씻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가나안을 은혜로 얻고도 누리지 못하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인 아말렉은 영원히 진멸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것입니다. 주인에게 빚 진자, 즉 율법적은 삶을 살며 주님께 은혜 갚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이미도 주신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임을 알도록 나눠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을 씻겨 주는 삶이며, 탕감해 주는 삶인 것입니다.


2. 불의한 청지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본문에 ‘불의한(옳지 않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처음에 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고 하였으므로 이 점을 일러 ‘불의하다’고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이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집행하지 않은 자이기에 불의한 청지기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의’‘의’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란 인간적인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의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냐 아니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말씀하고,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하다든지 아니면 죄를 범했다든지 하는 말은 우리가 세상적인 어떤 윤리나 도덕, 율법 등을 어겼다는 말이기 보다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아닌 세상을 지향하는 삶이라는 차원에서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세상을 지향하는 동안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이런 상태를 일러 불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향한다는 것은 땅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말이기도 하며, 앞에서 살펴보았던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육체적이고 율법적인 삶, 즉 본능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아버지를 등지고 먼 나라로 도망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성공을 이뤄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상태도 불의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허락 받았으나 그 허락 받은 것을 누리지(살지) 못하면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분은 변화 되었으나 여전히 작은 아들처럼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뭔가 이루려고 하고, 사역을 통해 그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을 가진 우리는 불의한 자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평생에 가나안을 허락받고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간 이스라엘의 일세대처럼 불의한 자의 모습으로 사는 날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 불의한 청지기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이 맡기신 주인 보시기에 또 아버지 보시기에 아름답게 변화되고 바뀌는 삶인 것입니다. 주인이 맡기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허비하며 살았던 청지기가 주인의 원하심을 바로 알아 주인에게 빚 진 자들을 탕감해 주는 자로 사는 것이며, 아버지의 것을 받고 아버지 집을 떠나 스스로 뭔가 성공을 이루어 보겠다고 살았던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삶인가를 알아 아버지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 땅에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맡기신 주인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의한 청지기로 살 수 있는 존재들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사도 바울이 여기 형제라고 부르는 대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며,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육신에 있지도 않는 사람이라도 육신대로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그렇게 살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면 육신대로 살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능대로 산다는 것이며, 율법적 사고와 삶의 체계를 가지고 사는 것이며, 은혜 베푸신 주님 안에 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엇인가 하여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며, 아버지 집을 떠나 스스로 성공해 보려는 작은 아들이 가진 생각과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허락 받았으되 광야에 머물러 그곳에서 다 죽어간 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에서 벗어나 아버지 안에 거하며, 주인의 뜻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성숙한 자의 삶이며, 가나안의 삶이며, 아버지 집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변화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친구

여기서 말하는 불의한 재물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도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불의한 청지기 같은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맡은 청지기의 것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한다는 차원에서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시간, 건강, 재능, 물질 등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주인에게서 맡겨진 차원의 것이므로 내 것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불의한 것입니다. 그 불의한 재물로, 주인이신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인에게 빚 진 자들을 불러 주인의 것으로 탕감해 주는 것이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나 탕감 받은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대로라면 우리가 청지기 사무를 그만 둘 때 그때 탕감 받은 자들이 고마워서 청지기 사무를 그만 두고 할 일이 없는 우리를 받아 줄 것이라 합니다. 세상에서는 가능한 것이지만 영원한 세계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청지기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 허락한 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불의한 청지기 같은 우리에게 주인이신 하나님이 맡기신 우리의 것이 아닌 재물로 우리가 사귀어야 할 친구는 누구입니까? 그것도 우리가 청지기 사무를 그만 두고 영원한 처소에 갈 때 맞이할 수 있는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 친구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이며, 친구라면 서로 상대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서로 더 이상 종이 아니며 더 이상 주가 아니라 오직 친구의 관계라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을 그들에게 모두 일러주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친구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는 언제까지나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서로 친구가 되어야만 정상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친구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물론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릴 완성된 그 나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영접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맛보며 살았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안 청지기가 그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빚 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것이 바로 그 친구를 사귀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존재가 된 것이 바로 친구이신 주님을 사귀는 것이며, 더 가까워지는 것이며, 우리를 그 나라에게 영접 받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 땅에서 하는 작은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0-12) 여기 지극히 작은 것, 불의한 재물 그리고 남의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뒤에 있는 것들, 즉 큰 것과 참된 것 그리고 너희의 것과 대조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이런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달란트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기고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계산 하실 때 맡기신 달란트로 남긴 자들에게 하는 칭찬입니다. 여기서 종이 들은 말인 ‘작은 일’은 주인이 다시 오시기 전 까지 그 맡은 종들이 한 충성스런 일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종들인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다 작은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시각으로 커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작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것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불의한 재물이며, 내 것이 아니기에 남의 것(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인의 뜻대로 했을 때 주인이 주신 것은 많은 것이고, 참된 것이고, 내 것입니다. 보이는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맡겨진 일을 잘 감당 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 진짜 참 된 내 것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뜻은 그 참 된 것을 맡기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의 모든 작은 일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며, 연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내 주위에 보잘 것 없는 사람, 나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하십시오. 그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 합니다. 그의 발을 씻겨주며, 그를 탕감하여 바른 하나님의 뜻을 나눠 주십시오. 일을 해서 갚으려는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그가 베푸신 은혜를 누리는 것이며, 그분이 원하시는 장성한 자로 세워져 가는 것임을 나눠 주십시오. 그 삶이 친구를 사귀는 삶이며, 그 삶을 통해 더욱 더 친밀한 관계가 된 우리의 친구 된 주께서 그 날에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런 삶이 밝아오는 2010년 한해동안 더욱 더 아름답게 이루어져서 예원 모든 가족들이 함께 세워져가며 사랑하며 행복을 주는 자로 만들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어떤 자들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2.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는 것과 세족식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3.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말씀하는 '불의'라는 의미의 성경적 뜻은 무엇입니까?

4. '불의한 청지기'가 사귀어야 할 친구는 누구이며, 사귄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지극히 작은 것'을

   맡기신 주인의 의도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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