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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전하는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본문 / 10:16-21

 

 

1. 그리스도의 말씀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음부에서 모셔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 있고 그 마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만 합니다. 또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전파하기 위해서는 보냄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된 원인을 추적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족보를 역으로 올라가고 올라가면 하나님의 창조가 나오듯이 우리가 믿게 된 원인이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보내시는 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복음서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의 내용까지도 사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10:17 / 표준 새 번역)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싸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4:27)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도 보면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있는데 그 설교 내용도 구약의 글을 인용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설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8장에 로마로 잡혀가 가택연금을 당한 후에 찾아오는 자들에게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8:23)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아니하고 세상의 성공이나 복을 받는 비결이 증거 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의 적극적 사고방식은 심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내용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긍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듣는지를 잘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앞에 8절에서 전파하는 내용이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전파되면 믿는 자가 많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저희 교회에 주신 복음의 설교 내용을 가지고 좀 더 큰 교회에 가서 전하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을 가지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는 자도 기분은 좋겠지 만은 그러나 복음을 전한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2. 들어도 믿지 않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10:16)라고 합니다.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내용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고 있습니다. 이미 복음이 증거 되었는데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구약에서 증거 되었는데 그러나 그 복음을 과연 누가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도 보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3:8)고 합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증거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다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복된 소식을 거절하거나 기쁜 소식을 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복음이기에 사람들이 믿지 아니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 앞에 15절에서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5)고 하는 이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2장에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52: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 한 좋은 소식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 증거 되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믿음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 아름다운 소식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오는 메시야가 고난 받은 종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사야 52장을 보면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52:13-15)고 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장래에 지극히 존귀하게 되고 열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열 왕들이 그 입을 봉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오시는 모양은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습이 사람보다 상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12)고 말씀합니다. 고난 받은 여호와의 종, 너무나 볼품이 없어서 배척받았던 종 그러나 그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매 맞음이요, 대신 죽임당하는 이 종이 바로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 모습의 메시아를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그때와 똑같이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메시아를 믿고 따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2. 핑계치 못함

그러나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0:18)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다는 핑계가 통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온 세상에 다 증거 된 것입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19:1-4)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건축가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공공연히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낮은 낮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밤은 밤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선포나 낮과 밤의 찬양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무언의 계시이며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한 만물의 선포와 찬양은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모든 곳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 지구상에 사는 어떠한 인간도 이런 만물의 계시의 영역 안에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18-23)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선포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말씀을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메시아를 믿는 일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까?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의지한 까닭에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명기 32장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1)고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고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모세를 통하여 이미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최신 유행하는 신들을 좇아 다시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다 선포되었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3. 주의 은혜로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고 찾지도 아니한 자들로서 그저 신이라고 부르고 찾는 것은 전부 자기를 위한 신, 즉 우상을 찾아 섬겼던 것입니다. 그 신의 이름이란 우리가 어떻게 부르든지 결국은 내가 구원받고, 우리 집안이 잘되고, 우리나라 잘되게 해주는 신이라면 부처든지 예수든지 얼마든지 받들어 모시겠다고 섬겨온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우리가 기대하는 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 볼품이 없는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습니다. 연약하며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잡혀가실 때에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조용하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 고난 받는 종을 자기의 메시아로 고백할 자가 과연 누구 있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자기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길임을 누가 믿었으며 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10:20)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바울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그를 믿으면 믿는 자도 함께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찾고 문의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도리어 그런 메시아라면 오히려 피하고 싶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찾은바 되고, 나타난바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요 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비유를 알아듣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사 듣게 하시고 또 상한 심령이 되게 하사 그 말씀을 한자 한자 우리의 심령 가운데 새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기적이며 복인 것입니다. 이 화창한 날씨 가운데서도 다른 곳이 아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또 그 들은 복음을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복음은 언제부터 전하여졌고, 복음을 믿는 자가 없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주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인간들이 자신이 믿지 못함에 대하여 핑계치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까닭과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6.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보다 더 예수님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주를 믿게 된 것이 은혜임을 우리는 어떻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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