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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답하라

본문 / 22:63-71

 

 

1. 믿음의 수혜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 즉 메시아입니다. 인간들에게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일을 해 주는 구원자가 아니라 오직 죄에 갇힌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시며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배를 부르게 하는 일은 배제한 채 순전히 영혼 구원만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하면 듣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이 볼 때에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포함해야 복음다운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에 몰두한 사람은 복음에는 치유의 은사와 능력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와 도덕을 신앙의 덕목과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것을 참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는 사람은 선교를 강조해야 복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마다 자신의 관점과 관심에 따라 예수를 바라보고 복음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생명만을 증거 하는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의 믿음에 만족하며 또 지금 듣고 있는 복음에 불만이 없으십니까? 뛰어난 도덕군자가 되어 이름이 높임 받고 대접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이 풍족해진 것도 아닌 현재의 믿음에 만족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자신을 믿음의 수혜자로 인정 하시는가, 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스스로를 믿음의 수혜자로 여기신다면 그것은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고, 성취하시고 또 성취하실 하나님의 사랑에 전혀 의문도 충돌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형편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진 그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인해 주어졌음을 알았기에 현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죄에 대해 깊이 자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로 인해 아파할 수 있는 것이며 진정한 믿음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도 다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삼년의 세월에서 최대의 수혜는 통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체험했지만 통곡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일생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한 후, 바로 그때가 유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기에 대해 알았고 또 확신했고 장담했던 모든 정체성이 무너짐을 의미하는 통곡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고 따랐던 일에 있어서 최고의 수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베드로와 같은 수혜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나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주가 누구시고, 주의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점에서 잘못되어 있기에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믿음의 수혜를 입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수혜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기대하는 수혜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십자가에 대해서도 내면적인 충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선지자 노릇 하라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할 때 지키는 사람들이 “63.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22:63-65)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놀이를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뒤에서 손가락 하나로 목을 살짝 찌른 후에 손가락을 펴서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는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놀이를 하는 것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누가 때렸는지를 맞춘다면 선지자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 주겠다는 의도입니다. 이들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힘을 선지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눈이 감긴 상태에서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알아맞히는 것처럼 개개인의 장래 일도 미리 알아 불행을 피하게 해주는 식의 능력이 있어야 선지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가진 선지자에 대한 생각이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붙잡은 예수를 선지자도 메시아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때리며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이들은 복음서가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여기며 또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오늘날 소위 치유사역자라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사건이 계속 있어야만 합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과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아시고 예언하신 것처럼 신자로 하여금 장래 일을 알 수 있는 예지의 힘도 주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이 나타내고자 하신 능력이었다면 예수님이 붙잡혀 매 맞고 조롱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능력에 대한 오해도 만만치가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가 악을 물리치는 힘과 도구로 인식되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붙잡아 때리고 조롱한 유대인들만이 예수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 역시 예수를 잘못 알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합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아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즉 십자가라는 형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저 옛날 로마시대에 사용하던 사형 도구일 뿐인 것입니다. 설사 삽자가의 도에 관심을 둔다 해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으로 밖에 간주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가시적이고 물리적이며 체험적인 것으로 베풀어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치유와 세상일의 성공으로 나타난다면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미련한 것이 아니라 능력일 것입니다. 때문에 미련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 기준에서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 또는 육신의 문제와는 무관한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치유나 세상일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유대인처럼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에 붙들리게 되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자기 의지와 결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게 되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통곡과 같은 자기 무너짐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를 때리는 자들의 조롱대로 눈을 감고도 누가 때렸는지를 알아맞힌다면 과연 그들에게서 베드로와 같은 통곡이 나오게 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통곡은 말씀으로 인한 최대의 수혜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묶여서 베드로 자신이 무너지는 통곡이 우리가 주의 말씀에서 간절히 원해야 할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3. 죄를 드러내는 죄

예수를 때리고 조롱한 사람들은 그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예수에게서 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날도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그들과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말하는 복음을 노골적으로 천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특별한 힘이 되는 능력이 빠진 복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듣기 좋은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참된 복음으로 간주함으로써 십자가만 증거 하는 복음은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만 증거 하는 복음에 대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고집스럽게 십자가 복음만을 말한다면 그런 자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무시와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붙들린 신자가 가야 할 길이며 세상에서 받아야할 대접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66절을 보면 날이 새자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 들입니다. 그리고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22:67)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간주하고 붙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네가 그리스도가 맞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잡아간 그들의 이러한 물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애당초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목적한 대로 빠져 나갈 수 없는 구실을 만들어 예수님을 죽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의도를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67.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22:67-68)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는 타협도 설득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아니할 사람들이고 믿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길을 가는 신자가 분명히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조롱과 무시를 의식하고 두려워한다면 그 까닭은 여전히 나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를 붙잡고 때리고 조롱하고 욕하는 그때의 사람들을 비난한다면 과연 옳은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작정 너도 똑같은 인간이니까 비난 하지 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그때의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가 나의 죄로 드러남을 볼 수 있어야 죄인의 자리에서 은혜의 크심과 감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치유와 같은 육신의 일과 무관하게 자신을 죄에서 건지신 은혜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영원히 지옥에 머물러야 할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러한 신자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도,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무리들이 예수를 때리고 조롱하고 욕할 때에도 그들의 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체념이나 인내가 아닙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면 돌이킴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인간의 행위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고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을 옹호하는가라고 항변하고 싶습니까? 이 말은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유대인들과는 다르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도 유대인과 다를 바 없이 내 입맛에 맞는 종교의 길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이 믿음이 나를 배부르게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리를 베드로와 같이 통곡하게 하여 바른 믿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붙들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내가 믿어주는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짜 믿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치유와 같은 것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으로 예수를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도 바로 이런 믿음, 즉 자기 확신을 근거로 예수를 믿어주는 수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확신도 자신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통곡하게 한 것이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9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22:69)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의미하는 것은 한마디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이 앉아계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권능의 모든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 눈앞에 있는 예수님에게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더 분노하게 되면서 더 이상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섣불리 진리 편에 서 있는 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베드로가 자신을 착각한 것과 같은 큰 착각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로 여기면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진리는 우리를 자기 확신과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으로 끌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신했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통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정당하게 되면 다른 이의 죄에서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런 이유로 비판과 정죄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죄를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면 나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비판과 정죄를 받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를 좇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자기 부인의 증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신자에게 최고의 삶은 죽음의 존재인 나를 보게 되고,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생명이 됨을 알고 은혜에만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세계에서 얻게 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늘 예수님 앞에 부끄럽고 면목 없는 자로 나오게 됩니다. 오늘도 예원가족들 모두가 이런 모습으로 주 앞에 서서 그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무엇이며 또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주를 따름으로 얻은 베드로의 수혜는 무엇이며 오늘날 성도들이 이 같은 수혜를 얻지 못하 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을 붙든 이들과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4.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이유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5. 자가의 도는 무엇이며 또 십자가의 도에 붙들린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날 신자들이 맛보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7. 공회에서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냐?”고 묻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을 비난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주를 좇는 신자에게 나타나는 자기 부인의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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