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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46-52)

 

1.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오늘 본문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는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5절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10:35)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36)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1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51)라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똑같은 물음에 대하여 제자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라는 대답을 하고,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0:51)라는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똑같은 물음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와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이 달랐다는 것은 인간이 이처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단순하게 보기에는 예수님이 같은 질문을 한다 할지라도 맹인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답을 한 맹인과는 달리 눈이 정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맹인과 같이 보기를 원한다고 하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고 또는 보지 못하는 것을 단지 시각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그러한 생각도 분명히 맞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은 보고 보지 못함의 의미를 단지 시각적인 것으로만 따지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3:26)고 합니다. 여기 이 말씀을 보면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님은 눈 먼 바리새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3장에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라고 하여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 가운데 눈 먼 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 먼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보고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처럼 시각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제자들이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맹인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각기 자신의 처지에서 드러나는 당연한 반응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본문인 3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10:38)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맹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임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를 단지 자신들에게 영광이 되는 자리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자리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에게 주어지도록 예비 된 자리인 것입니다. 신자의 영광 또한 주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가 이러한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자신들이 누릴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보지 못하는 맹인과 다를 바 없는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0:52)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맹인의 믿음이 그 맹인을 구원하였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는 맹인의 믿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맹인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비교했을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눈 먼 자이면서도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0:47)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을 보면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서는 불쌍히 여기심이 나온다는 것을 바라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현재를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처지로 바라봤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부르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이 나오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실상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거나, 우리가 처한 현실이 비참한 어려움의 상태라면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쌍함은 결코 주어진 형편이나 환경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불쌍함을 그렇게 보게 된다면 맹인보다는 맹인에다가 앉은뱅이인 사람은 더 불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차이는 있기 마련이기에 형편이 더 어려운 사람은 더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불쌍함은 모두가 동일할 뿐입니다. 죄인이라는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게서 우리 인간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맹인은 그 인생을 두고 생각한다면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또 경제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회에서는 자연히 뒤로 밀려 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부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선언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맹인은 과연 성공자인가? 아니면 실패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영광이 되는 자리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 덕분에 자신들이 원하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부르는 이유가 예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찾고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오늘 본문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에게서는 불쌍히 여겨주심이 나오는 것이지, 세상의 영광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부르는 자들의 마지막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상관없이 그저 멸망의 자식일 뿐인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인 41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좌우편의 자리를 청탁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다른 열 제자가 듣고서 그러한 청탁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왜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히 여기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들이 서로 경쟁의 관계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예수님께 청탁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에 비해서 결코 모자람이 없고 자신들도 예수님을 그들만큼 섬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히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잘될 때 분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보다 잘된 그 사람과 비교하여 나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분히 여기면서 하나님 불공평 합니다라고 하는 불평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웃의 불신자가 신자인 나보다 더 잘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도 저렇게 잘되는데 하나님은 뭐하십니까?’라는 불평이 우리 마음에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육신적인 욕망과 관련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는 오직 인자와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올 뿐입니다. 그 인자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처럼 자신의 불쌍함을 볼 수 있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아지게 하시고 또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 가를 깨달을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거지 바디매오도 맹인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면서 불쌍히 여기심을 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참된 믿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맹인이 보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맹인에게는 눈을 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에게는 내가 잘 되고, 내 사업과 가정과 자식이 잘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당연한 문제라는 식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고 부르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외적인 형편과 환경을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은 외적인 형편과 상관없이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눈이 뜨인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불쌍한 자임을 알고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자신의 형편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신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늘나라의 생명만이 참으로 귀함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경쟁에서 타인을 이기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불행한 것이고 비참한 상태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필히 자신을 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곧 하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살았던 어리석은 자요 맹인이었음을 절감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은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알아주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것은 아무리 많이 가진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거지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맹인은 모든 것을 차지한 부요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곧 세상의 전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지난주의 제자들의 대답이나 아니면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처럼 대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떠한 대답이 물으신 주님의 원하심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맹인임을 깨닫고 그래서 예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앞에서 그런 우리의 실체를 발견하고 우리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제자들과 바디매오에게 한 예수님의 질문과 그들의 답은 어떻게 다르며 또 그들의 답이 결코 이상하다고 여길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앞의 질문에서의 우리의 생각이 성경의 말씀과 다른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 속에서 우리 는 무엇을 알 수 있다고 합니까?

5. 불쌍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우리와 성경의 시각의 차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6.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우리에게 제자들과 같은 분함과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위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9. 맹인이 보기를 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진정으로 눈이 뜨인 사람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11.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은 무엇이며 또 믿음으로 말미암은 증상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12.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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