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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위로 부터 오신 이

본문 / 3:31-36

 

1. 신자의 사명

우리가 보는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장의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세상의 존재성에 대한 선포의 말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이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만 선포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포란 일방적으로 던지는 말이지 부탁도 아니고 믿어달라고 애걸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결과를 기대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런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만 말하고 끝날 뿐입니다.

선포한 후의 결과는 결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복음을 잘 설명하고 말을 잘해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만 증거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해도 그 결과를 두고 마치 자신이 그를 믿게 한 것처럼 여기면 참으로 곤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남겨두신 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붙들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일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선포하라고 있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를 믿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또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잘해줬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을 잘해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간절하게 말한 것 때문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은 것임을 분명히 고백한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도 바로 그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도함으로서 하루에 열 명이 믿게 되었든 아니면 백 명이 믿게 되었든 그것은 모두가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이지 나의 공로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공로에 대해서 전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공로로 되어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칙입니다. 비록 인간이 일하고 인간이 일함으로 되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건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존재하셨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그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가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복음이 홀로 독립적인 힘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것이고 또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이기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결코 자기 업적이나 공로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하면 은혜와 기적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굳게 세워지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이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한 사람을 높이거나 경배하고 찬양한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바울을 찬양했습니까? 성경 어디에서 사도들을 찬양하고 선지자들을 경배했습니까? 오히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드러난 능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자 그들을 꾸짖으면서 그 자리를 피해버린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업적도 공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주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고 그들이 바라보고 나아갈 분은 그리스도임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사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도,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한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영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축복이기에 그리스도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마음을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인 요한에게 불만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스승인 요한에게로 왔던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리는 것을 본 제자들의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에 대해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다만 그를 증거하라고 보냄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으로 이미 기쁨이 충만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요한의 마음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왜 요한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뒤로 사라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마음가짐, 성도로서의 마음가짐,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3:31)라고 합니다. 위로부터는 하늘로부터라는 말로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고 자신은 다만 땅에서 난자로서 땅에 속한 자이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말은 땅에 속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불만을 보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라는 분과 자신과는 결코 동등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을 예수님과 대조시켜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지만 자신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2절에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3:32)라는 말을 보면 요한이 자신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차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직접 보고 들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지만 자신은 땅에서 난자로서 제한된 인간적 경험으로 알게 된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철저히 대비시키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비교될 수도 없고 동등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에 해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것은 제한된 체험과 깨달음 안에서 말할 뿐입니다. 즉 그가 직접 보고 들은 하늘의 일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누구든 자신의 말에 대한 부족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완벽하며 자신의 복음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다만 깨달아진 복음을 전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으로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신학이나 성경에 대해서 과신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그것이 참된 신자가 되는 길이고 만약 반발한다면 신앙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로서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봐야 결국 우리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가 과연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느냐의 여부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과신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를 힘쓰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그의 말재주나 수준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으로 구분될 리가 만무하지만 때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의해서 복음의 수준을 구분하게 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유식한 문장을 사용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수준이 높다는 생각을 하면서 귀를 기울이는데 반해 평이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전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자기 지식의 만족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꼭 수준 높게 전해야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32절에서 말하기를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의 증거란 바로 위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일을 직접 보고 들은 분입니다. 그분이 증거하셨다면 그 복음의 수준은 땅에 속한 우리에 비해서 얼마나 높은 수준이겠습니까? 제한된 깨달음으로 전하는 우리에 비해서 완벽할 수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었는데 하물며 땅에 속한 우리가 아무리 신학지식과 말재주를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말에 설득을 당하고 그 말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증거 해도 그 증거를 받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자신이 증거 한들 그 증거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영생은 자신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요한복음이 가장 중점으로 말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생소하게 들려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린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복음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에 있어서 자신은 그 아무도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결국 믿음이나 영생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증거하셨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목사의 설교가 여러분을 구원시킬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목사의 설교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붙드실 뿐입니다. 즉 목사는 전하는 자로서 그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는 결코 목사를 바라봐서도 안 되고 목사의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목사라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 요한의 마음인 것입니다.

 

3. 참된 증거

오늘 본문 33절부터 보면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3-36)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일을 직접 보고 들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증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오직 한 분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인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계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고 동등 되게 여김받을 수 없는 이유이며, 무엇 때문에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며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참으로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높으신 분으로 여겨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그분이 증거 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보지도 못한 하늘의 일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예수님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영생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높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6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요한의 심정에서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향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고민하고 염려하고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있었던 요한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재주로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재주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앞에서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자이며 땅의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앎은 참으로 빈약합니다. 완벽한 앎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인 수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앎에 대해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앎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앎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을 자신의 앎에 머무르게 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만이 마치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것으로 인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우리로서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난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을 높이도록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성도가 전도를 하고 마치 자신이 그를 전도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오직 그리스도가 세워지도록 힘쓰십시오. 우리는 감히 그리스도만이 높임 받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영생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지 교회에도 또 우리 모두에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진실로 아는 신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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