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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팔

본문 / 8: 1- 2

 

1.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점은 백성들과의 관계 형성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평안과 축복을 선포함으로서 삯을 받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만 고지식하게 전달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전달되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지, 말씀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원칙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보냄받은 존재이지 백성들과 세상적 이해관계로 얽혀진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백성들과 세상적인 이해관계로 얽혀지게 됩니다. 일단 백성들로부터 삯을 받아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일에 치중하게 됩니다.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말은 삼가는 것이 원칙이고, 들어서 기분 좋은 말과 희망적인 말을 전파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거짓 약속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는 하나같이 긴장감도, 급박함도 없습니다. 항상 평화이고 잘만하면 복 받고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참된 선지자들의 말은 하나같이 긴장감이 있고 급박한 말씀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로운 시대를 원합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는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런데 참된 선지자들의 말은 사람을 긴장되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문제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니 심판이니 하는 말들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낙심하게 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사람을 참된 선지자로, 그들이 하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말씀대로 증거하는 선지자는 가차 없이 배척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지자는 세상을 보면서 심판을 선포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보면서 심판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세상을 봤습니다. 세상에 어떠한 긍정적인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보고 세상을 판단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 안에서 실현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선지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심판받을 수밖에 세상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차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봤습니다. 자신을 봤을 때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제사 드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만하면 하나님도 잘했다고 칭찬하실 모습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심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스라엘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열심히 종교생활을 한다고 할 때, 내 자신이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인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자신이 심판받을 자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판단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28:15-19)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받아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은 바로 이것을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시는 분이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신을 바라볼 때는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들의 말에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평안을 외쳤지만 참된 선지자는 하나같이 심판을 외쳤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시각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복이나 말하면서 안심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살 수 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십일조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일성수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의인 되게 하는 믿음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의를 믿는 믿음입니다. 내가 뭔가 잘해서 의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의로운 행위가 의가 되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 때 살아남을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에 성취되어 가는 과정속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의 재림이 약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죄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상황에서 복을 구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안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포도나무 열매가 문제가 아니고 외양간에 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심판에서 사는 것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만이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말씀을 남겨 놓으시고 말씀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심판을 생각한다면 포도나무 열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자식들의 성공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심판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은 돈도 아니고 자식의 성공도 아니고 포도나무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를 의롭게 하는 주님의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인데, 심판에서 그 피를 믿는 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 선교, 구제, 이러한 것들이 심판을 극복하도록 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뿐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특징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심판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심판에서 우리를 살리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돈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경고의 말씀조차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에 의해 죽으신 사건 자체가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단지 천국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신 현장인 십자가 앞에 나와서도 복이나 말하고 재물에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결코 포도나무 열매나 신경 쓰고 외양간의 소에나 관심을 두고 살아갈 때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경고

오늘 본문도 그러한 경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8:1-2)고 말씀합니다. 나팔이란 경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팔은 사람이 부는 것과 하나님 쪽에서 부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19:13)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백성들을 모으는 신호로서 나팔을 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부는 나팔입니다.

그러나 16절에 보면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6)고 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나팔 소리는 사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팔 소리가 났을 때 모든 백성이 떨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는 경고의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고의 소리를 하나님 쪽에서 낸다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 일곱 나팔을 일곱 천사가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일곱 천사는 세상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팔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쉴새 없이 세상을 경고하시는데 세상은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마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 증거는 날마다 자신의 삶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이스라엘을 보는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포도나무 열매나, 감람나무의 소출이나, 외양간의 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보다는 세상에서의 소출이 더 중요할 뿐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도 세상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보면서 심판의 경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복 달라는 말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복이 분출되는 현장이 아니라 심판이 경고되는 현장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자는 결코 십자가 앞에서 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될 뿐입니다.

세상이 심판으로 망하는 상황에서 교회 부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 속에서 돈이 과연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가 교회를 몇십만 명 모이는 교회로 발전시켰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심판이란 상황에서 교회 부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용지물이며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 부흥에 목을 매고 산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채 살기 때문에 자연 모든 관심은 자신과 교회에게로 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는 시내산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시내산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가 있는 곳입니다.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의 접근을 막습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이 강림하신 곳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속된 인간의 접근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 소리는 올라오지 말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가 더럽고 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거룩한 나를 대할 수가 없고 대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내산의 모습이 그대로 이스라엘 속에 현실화 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막인 것입니다. 성막에는 이스라엘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이스라엘이 접근하면 이스라엘은 죽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충족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하나님이 허락한 제사장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허락된 제사장만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역시 속된 인간이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먼저 자신의 몸에 피를 발라서 정결하게 한 후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거룩에 접근할 수 없고 말씀 앞에서는 죽어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간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성소의 법궤에는 날마다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피가 뿌려지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이스라엘 안에 강림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막이 그대로 우리들 속에 현실화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양 되셔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자리야말로 '너희는 죽어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경고하는 경고의 나팔소리가 있는 현장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존재이고, 말씀 앞에서는 심판받아야 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나팔 소리가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십자가 앞에서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지를 않습니다.

단지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 덕분에 복을 받는 것만 생각하고 나올 뿐입니다. 만약 십자가 앞에서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는 자라면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친히 말씀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밖에 없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경고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순종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말씀을 충족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경고의 나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충족시키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만이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우리 쪽에서 말씀을 충족시켜야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무서운 하나님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당신이 메시아거든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국 하늘의 표적, 즉 기적을 일으키는 자라면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그것으로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품고 있는 죄덩어리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힘과 능력이 자신에게 베풀어지기를 기대하고 나옵니다. 예수 덕분에 교회가 부흥되고, 예수 덕분에 돈을 벌고, 예수 덕분에 자식이 잘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아예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무색하게 해 버립니다. 이런 인간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경고의 나팔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죽을 마음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천국 가는 발판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는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를 향한 경고의 나팔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외치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경고의 소리를 듣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생각날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피라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멸망 속에서 나를 살리는 것은 주님의 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괜찮고, 고생해도 괜찮고, 나는 오직 구원의 주님으로 기뻐하고,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로 즐거워하며 살겠다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일곱 천사가 받은 일곱 나팔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서 경고의 나팔을 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세상에 심판이 임할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현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십자가를 대하실 때마다 심판을 생각하십시오. 심판의 경고 속에서 주님의 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 보시기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선지자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데 왜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3.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하박국 선지자가 논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의 가축이 없어도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6. 일곱 나팔을 일곱 천사가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럼에도 세상은 어떻게 살아간다고 말씀합니까?

 

7. 시내산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8. 시내산의 모습이 이스라엘 속에 현실화 된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까?

 

9. 이스라엘의 성막이 우리들 속에 현실화 된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까?

 

10. 오늘날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며 왜 주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11. 십자가에서 외쳐지는 경고의 나팔 소리는 무엇이며, 그 나팔 소리를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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