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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10

 

1. 믿음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대비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2)라고 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것을 보니까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거듭나는 것 역시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고 성령이 하는 일은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하심으로서 믿음, 즉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문제만큼은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일이 4장에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니고데모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리스도와의 만나는 것에 대비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와 만남으로서 창조되어지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창조되어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믿음이 있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유대를 떠나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4: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4)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단지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통행하려고 하신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은 단지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사건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우연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분명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되어진 은총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어진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총의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것, 도중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 모두가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고자 한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4:1)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요한을 두고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보면서 누구의 세례가 더 뛰어난가?’하는 두 세례에 대한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이유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세례를 보면서 세례의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과의 세례를 비교하면서 누구의 세례가 뛰어난가를 비교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를 떠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심으로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것은 결코 우리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결과로 되어진 것임을 굳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것을 내어놓고 믿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구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몰리는가를 보면서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참 믿음은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부터 보면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4:5-6)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지 사마리아의 지역적인 위치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종교적 자존심이 있었음을 언급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에게 성전이 있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인들도 야곱으로 이어진 축복을 대대로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종교적 경쟁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가 자신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구원의 의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는 말을 하십니다. 이 말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고 답합니다.

이러한 여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몰랐기에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문제는 물을 달라고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면 그분에게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생수가 무엇이며 또 생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생수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지도 못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요셉이 준 땅이 있고 야곱의 우물이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여겼습니다. 즉 믿음에 있어서는 달리 필요한 것도 구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말씀하는 것은 여인의 문제가 무엇임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디. 결국 예수님은 3장에서는 니고데모의 문제점을 드러내시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를 드러내심으로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달음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가 주시고자 한 것이 자신에게 없으면 안되는 참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에게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무것이나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고자 하신 것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생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리심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달리 믿음을 위해 구할 것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신앙의 문제점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인데 정작 우리는 생수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 잠시 잠깐 주린 목을 적셔주는 물에 집착을 하고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이면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리고 있고, 성경을 보고 기도한다고 해서 신앙인이 다 된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단지 예전의 유대인들의 어설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요청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세상 누구 한 사람도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어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성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수는 그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생명이 성전에서 나오고 자신들이 철저히 지키는 율법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눈을 두지 않고, 생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예배당이 있고 목사가 있고 성경이 있고 예배가 있다는 것 등으로 인해서 정작 그리스도로부터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고 현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으로 그쳐 버릴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런 우리의 문제를 주의 말씀 앞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오늘도 주 앞에 그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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