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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사렛 사람 예수

본문 / 2:19-23

 

1. 나사렛 사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시고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세주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잠잠하기만 했습니다. 기껏해야 동방에서 온 박사 몇이 예수님을 찾아 경배했을 뿐, 정작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하나님이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인 동방박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경배하도록 하셨던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5절의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2:15)는 말씀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헤롯을 피하여 베들레헴을 떠나 애굽으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두고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하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나오신 그곳을 애굽으로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은 애굽, 즉 이방인으로 평가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계신 그곳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자기들을 위해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점령하고 다스리심으로 이스라엘을 그 중심에 굳게 세우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베들레헴의 짐승의 우리에서 초라하게 나신 메시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줄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꿈을 간직한 채 그 꿈을 성취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결국 우상이며 인간들이 만든 다른 예수일 뿐이며 그런 그들이 곧 이방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누구라도 자신의 꿈을 간직한 채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는 결코 신자가 아니며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에 불과할 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잊지 말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 23절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23)는 말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요셉의 가족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헤롯이 죽고 아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요셉의 가족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피하게 됩니다. 뒤를 이어 왕이 된 아켈라오도 헤롯 못지않게 포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셉이 이스라엘 땅으로 가기를 무서워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사렛이란 동네로 간 것을 두고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구약의 선지자 중에 그 누구도 이러한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예언이 실제 있었는데 구약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로 합리화시키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 예언의 성취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2. 자기 백성

구약의 어느 선지자도 나사렛 사람에 대해서는 예언하지 않았지만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와 일치된 예언은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2-3)고 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보기에 갈릴리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에 거주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그 갈릴리에 있는 마을 중에 작은 마을입니다. 그것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갈릴리의 나사렛은 유대인들에게는 눈길도 가지 않은 하찮은 곳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나사렛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아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을 분으로 오신다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서 9장에 보면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1-2)고 말씀하신 것처럼 흑암에서 행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고통 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빛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4장에 있는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4:14-16)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칠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비췸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이 임하는 곳은 어둠인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라보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어둠과 흑암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큰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결코 어둠과 흑암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고,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흑암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을 물리칠 빛 또한 필요치를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과 아브라함이 조상이라는 외적인 조건에 둘러싸여서 자신들의 본질을 보지 못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애굽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가 누구인 것입니까? 신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증거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스스로 자신을 흑암과 어둠에 처한 자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흑암과 어둠에 처해서 고통스러워하며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보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탄생된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흑암과 어둠에 처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흑암과 어둠에 처한 존재는 가난하고 헐벗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 자신처럼 학벌도 좋고, 좋은 회사를 다니면서 양심을 따라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치 빛에 거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외적인 것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삼고 세상의 영광이 곧 자신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애굽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무엇으로 자신을 치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멸망의 자식일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이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평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자신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바라보는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 잘 지키고, 기도 열심히 하는 소위 종교적인 생활을 잘하는 자신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러한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가리고자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애굽으로 간주한 이스라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고 기뻐하실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죄인으로서 다만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은 겉으로는 화려한 불빛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실상은 어둠이며 흑암입니다. 이 어둠과 흑암의 실상을 발견하고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그들이 자기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3. 애굽적 사고방식

나사렛에 대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1:45)고 증거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는 말로 빌립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사렛 사람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고 하찮은 곳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곳에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 나다나엘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애굽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1:46 )고 말합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일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어서 무시하고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 것은 나다나엘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7:52 )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출신 지역이나 혈통,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러한 외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치 있는 곳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난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며, 이것이 또한 애굽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붙들고 있는 그러한 외적인 조건들을 또 애굽적 사고방식을 모두 무너뜨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조건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흑암과 어둠의 곳에 비취는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흑암과 어둠의 자식이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 임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복이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자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외적인 조건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빛으로 오셨다는 것으로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흑암과 어둠의 자리에서 건져주시고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부끄럽습니까? 인간적 시각으로는 하찮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 부끄럽지 않다면 또 인간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신 예수님이 부끄럽지 않다면 그것은 외적인 조건으로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세상의 애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애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그가 세상과 이웃을 대할 때 외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애굽적 사고방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각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은 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에게 예수님을 경배하게 하셨다고 합니까?

 

2.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방인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3.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고 하신 선지자의 예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유대인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날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기 백성은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7. 오늘날의 신자들이 흑암과 어둠에 처한 자신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러므로 발생되는 결과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만난 나다나엘이 가진 애굽적 사고방식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신앙생활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합니까?

 

9.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 것은 무엇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라고 합니까?

 

10. 주안에서 참된 이스라엘은 어떤 자라고 말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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