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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본문 / 3:10-12

 

1. 행함과 신앙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주장했던 세 가지의 명제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루터가 이 세 가지를 주장하게 된 것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신자의 신앙의 근거를 성경이 아니라 교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고, 구원을 위해서는 은혜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도 필요하다고 가르쳤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일에도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오직 성경과 은혜와 믿음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이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신자의 신앙의 근거를 교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신자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복종해야 할 거룩한 단체로 인식하게 하고 그 단체를 이끌어 가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목사를 또한 순종해야 할 대상의 위치로 올려놓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행함을 이야기합니다. 은혜받은 증거는 곧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행함으로 믿음을 판단하게 되고 결국 행함의 경쟁까지 유도하는, 진리와는 상관없는 모습만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면서 그 변화를 행함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함이 없는 사람의 믿음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들은 자연히 행함을 동원하여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한 확보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신자를 변화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삶에도 영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한 삶의 변화라는 것을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변화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가 어떤 것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타인에게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며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덕스럽고 인격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에 신앙의 근거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 다가왔을 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고 하면서 아주 심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도 그들을 요한과 같은 독설로 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아주 악한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함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그들은 그러한 독설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을 썼기 때문에 자연히 삶은 모범적이고 경건한 모습으로 비춰졌고 그로 인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존경받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았던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는 적대적인 관계에서 가장 큰 대립을 이루었고 결국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있었던 이 대립적인 관계를 잊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제사장 이런 사람들을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기독교의 원수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을 뿐이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던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크게 대립이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을 기독교의 원수로 치부하면서도 정작 교회 스스로는 바리새인의 길을 가는 아이러니한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또한 뒤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립적 관계의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제 무덤을 파고 있는 형국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좋은 열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고 말합니다. 열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자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러한 심판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들으면 매우 그럴듯한 말이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갖고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아무런 대안도 없는 허무맹랑한 말에 불과할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두고 먼저 좋은 열매를 맺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좋은 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나무가 애를 쓴다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요한이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애당초 너희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쁜 나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라는 증거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찍혀 불에 던짐을 받아야 할 나쁜 나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나쁜 나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좋은 나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구별을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사람들은 자연히 나쁜 나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신들이야말로 좋은 나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나쁜 나무인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자신들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는 독설을 받아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독사의 자식이라는 이 독설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대상으로 한 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를 향해 계속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어떤 외침을 하고 계실지를 제대로 알고 듣는 것이 지혜고 영혼이 사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쁜 나무를 대상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배나무 보고 사과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배나무가 그러한 말에 동조해서 사과 열매를 맺겠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쁜 나무라는 것입니다. 불에 던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쁜 나무라는 것이 오늘 우리의 본질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고 양심껏 바르게 산다고 해도 또 타인에게 존경을 받고 있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다고 해도 그러한 열매는 예수님과 상관없이, 신앙과 상관없이 세상에 차고 널렸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는 세례 요한의 말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쁜 나무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선언을 함으로써 심판의 도끼를 벗어날 수 없는 자리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제 다음 내용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사람들에게만 이해되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예수님에 대해서 왜 절실해질 수밖에 없는지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현실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비취는 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는 이 외침은 나 자신의 본질이 어떠함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를 향한 복음의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너희는 나쁜 나무다는 말로 모든 것을 종결짓지 않습니다. 만약 요한이 너희는 나쁜 나무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요한의 말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로 끝났을 것입니다.

 

3. 성령 세례와 불 세례

세례 요한은 10절에 이어서 11절부터 보면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1-12)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은 10절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성령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해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내용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즉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나쁜 나무를 변화시켜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요한의 뒤에 오시는 그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을 보지 말고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바라볼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성령 세례, 불 세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 세례는 말 그대로 성령의 능력이 덮쳐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불 세례는 불의 능력이 덮쳐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런 것입니까?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뜻합니다. 따라서 불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에게 덮쳐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저주의 자식임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이 불 세례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나름대로의 의가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의를 방패 삼아 자신이 심판과 저주에 자식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그 죄의 책임까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심판과 저주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불 세례가 아니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의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즉 성령 세례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그 능력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좋은 나무입니다.

결국 좋은 나무는 나쁜 나무라는 본질 자체가 달라져서 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나무라는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서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리에서 하늘에서 오신 의를 붙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는 자기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신을 건져 내신 예수님의 의로우심만을 자랑할 뿐입니다. 이것을 좋은 열매, 즉 알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곡은 예수님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지 흔히 교회에서 외치는 것처럼 알곡이 되라고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내용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함이 무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힘든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이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고정된 사고방식인데 그러한 행함이 무시되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은 인간이 생각하는 행함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 세례와 불 세례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로 증거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열매는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이 담당해야 할 몫이었던 심판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부어진 하늘의 은혜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로우심만을 높이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주님으로 인해 맺어지는 좋은 열매입니다.

신자는 이 열매로 감사하며 주를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신뢰와 믿음이 여러분의 영혼을 배부르게 할 것이고 그 배부름은 삶의 모든 일에서 기쁨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할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루터의 종교개혁 때 주장했던 세 가지 명제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렇게 주장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는 독설을 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며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세례 요한이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말을 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5.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고 합니까?

 

6. 세례 요한의 외침이 오늘날 교회에도 해당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 그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늘로부터 주어지는 구원과 그 가치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서 드러난다고 합니까?

 

8. 세례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9.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좋은 나무란 어떤 나무라고 합니까?

 

10. 사람들이 지금까지 말한 복음을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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