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금식
본문 / 마 6:16-18
1. 인간을 의식하는 인간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인생의 보람과 기쁨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때문에 자연히 외식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6:1)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이지 사람과의 관계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고 의식하며 산다는 증거인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3)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먼저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6:5)고 합니다. 주의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시 종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실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신을 사람들이 봐야 할 이유도 또 보여주어야 할 이유도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기도하면서도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누군가가 봐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 열심히 하는 믿음 좋은 분’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습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할 때 왜 사람을 의식합니까?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기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고, 기도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이 죄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피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 자체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신앙 행위로 여기는 기도, 성경 읽기, 구제, 헌금 등등이 사람을 의식하고 행함으로써 악이 묻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의로운 자로 나타내고 싶은 인간의 습성이 우리의 죄의 본질을 파악하라는 용도로 주어진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더욱 의로운 자로 포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열심히 행함으로써 자신의 믿음 좋음이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금식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나누었던 구제도, 기도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던 것처럼 금식 또한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흉하고 슬픈 표정으로 가장을 한 것입니다. 금식이라는 행동이 타인에게는 자신의 믿음과 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금식하냐?’고 물어봐 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기회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결국 금식을 하면서 금식의 행위의 대가를 사람들로부터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 대가는 칭찬이고 인정받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면 이미 원하는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또 따로 받을 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6:17)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금식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그것이 참된 금식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금식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면 사람들은 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금식을 하지 않는 척하면서 자신의 금식을 참된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인간의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는 것은 단지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8)고 말씀합니다. 이는 금식은 하나님과의 문제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기도, 구제, 헌금, 이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여줘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런 행위를 보면서 ‘믿음 좋다’, ‘의롭다’고 칭찬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는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재미가 있습니다. 서로를 인정해주고 높여주고 칭찬해줌으로써 인간의 정으로 똘똘 뭉치고 그 재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칭찬해 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서로를 칭찬함으로써 인간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그것이 마치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는 길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고 교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단합하여 정을 주고받으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좋은 교회가 되게 하자는 악한 발상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부터 포기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효력이 되지 못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인정한다고 해도, 단 한 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라고 해도 생명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라면 사람을 의식하기보다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생각하고 살피고자 할 것입니다.
3. 참된 금식과 신자
이사야서 58장에 보면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금식과는 전혀 다른 금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금식은 밥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절박함을 더욱 강조하는 것을 금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런데 금식에 대한 선지자의 말에는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결박되어 있고 묶여서 압제당한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참된 금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금식이 되는 것입니까?
사실 결박되고 압제당한 자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하는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밥을 먹지 않고 금식을 한다고 해도 결박당한 자를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 능력은 주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주께서 우리를 결박하고 압제하고 있는 사단의 손에서 구출하셨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참된 금식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금식이 과연 무엇을 이뤄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아무리 금식을 한다고 해도 죄인이라는 본질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하는 어떤 행함이 그를 의롭게 할 수 있는 효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기도를 하든 뭘 하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죄인으로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를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됨을 망각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밥이란 우리의 육신을 살리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금식의 의미에는 나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기도에만 열중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절실한 사정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비록 스스로는 살았다고 여기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 눈에는 멀쩡하게 살아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모든 인간의 결국은 심판이고 멸망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우리가 들어가야 할 죽음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써 사망에 결박되어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금식이었고, 이 금식이 우리에게 구원의 효력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참된 금식을 믿는 것이지 나의 금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종교의 습성에서 나오는 발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자의 진정한 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생명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의의 효력을 두지 않게 합니다. 다른 것에는 구원의 효력이 없음을 믿게 합니다. 생명이 아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가 전부라는 고백이 있게 할 뿐입니다.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는 힘이 아님을 믿는 이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보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무엇을 보이고 싶습니까? 이들이 우리의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리 칭찬을 하고 높인다고 해도 세상의 칭찬과 높임이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효력은 주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밥을 먹지 않는 금식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행위가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만 합니다. 신자가 금식을 한다면 밥을 먹지 않는 자신의 정성을 하나님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기대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나니까 나 같은 자는 밥 먹고 살 자격도 없는 자라는 것이 내 마음을 침으로써 금식을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이 금식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이 알게 하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슬픈 기색을 띠지 않습니다.
금식을 한다면 배가 고플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배는 고플지언정 그 마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신자의 금식은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입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비워지고 대신 하늘의 것으로 풍성히 채워지는 것이 금식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면서 하늘의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무엇이고 또 그것이 왜 어려운 것이며 그래서 그런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음이 드러나는 증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인간에게 있는 습성은 무엇이며 또 그 습성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4. 자신이 금식하는 것을 알아주길 원해서 인간들이 치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5. 주께서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신자이면서도 사람을 의식하는 교회의 모습과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신자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우리가 생각하는 금식과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는 금식은 어떻게 다릅니까?
8.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 보시기에 참 금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날 신자들의 진정한 금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신자의 금식이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