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본문 / 마 5: 6
1. 세상은 배부름을 주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무엇인가에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돈에 대해 목말라 하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해서 또는 자신에 대해서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것은 목마름은 있으되 만족할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목마름입니다.
가령 소경의 목마름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이 눈을 뜨게 되어서 천하를 다 가진듯한 배부름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지나면 또다시 다른 것으로 인한 목마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다만 예전에는 눈을 뜨는 것이 목마름이었다면 눈을 뜬 후에는 다른 것에 대해 목말라하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 목마름의 상태는 여전한 것입니다. 실직자들은 직장에 목말라 하지만 막상 직장을 구했다고 해서 목마름이 사라지고 배부름의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리를 배부르게 한 것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십시오. 일시적인 만족으로 인해 배부름을 느끼는 것은 있었겠지만 계속 지속되는 배부름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배부름은 일시적인 만족의 상태가 아니라 계속되는 영원한 배부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배부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천국은 배부름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배부름은 의로 인한 것일 뿐 세상의 것으로 인한 배부름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인해 항상 배고픔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것은 천국과는 상관없는 저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런 상태에 대해 전혀 애통하는 마음도 없고, 주를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자신의 소유가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가 가득해지면 배부름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소위 재벌들은 평생 목말라 하지 않고 주리지 않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이처럼 소유가 가득해져도 배부름이라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면 결국 소유도 복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에 보면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4-25)는 말씀을 합니다.
세상은 부요를 복이라고 말하고, 부요로 인한 배부름을 꿈꾸며 살아가는데, 이러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부요하고 배부른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항상 인간이 소망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세상의 것으로 배부름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배부르게 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오직 세상의 것으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선행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하지만 선행은 자기 의일 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의는 아닙니다.
사람이 선행에 목말라하고 일평생을 선행을 하며 살았다고 해도 선행이 인간을 배부르게 하지 못합니다. 선행에 힘쓰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보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있을 뿐 도와줄 수 없을 때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를 배부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선행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선행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의로 여기는 선행도 인간을 배부르게 할 수 없다면 세상의 선행 또한 예수님이 말씀한 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선행을 하고 싶은데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하지 못할 때 그에게서는 어떤 애통이 나오겠습니까? 분명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이지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애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선행에 붙들려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생각하는 악이라는 것도 기껏 해봐야 능력이 없어서 불쌍한 사람을 더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정도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심령의 가난과 거리가 먼 것이고 온유와도 거리가 먼 심령인 것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부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주만 바라보게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하나하나 잘라내야 한다는 의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벌거벗은 몸뚱이의 상태로 주를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곧 예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배부름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의에 대해 주려 하지도 않고 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의 의를 가득 쌓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부지런히 성경을 읽기도 하고 또 기도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면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주님으로 인해 배부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죽을힘을 다했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자기 백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나 같은 자를 찾아와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죽을힘을 다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과연 신자에게 멀찍이 떨어져서 ‘죽을힘을 다해서 나에게 가까이 나아오라’고 소리치는 분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예수님은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지만, 사람이 항상 다른 소원과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에게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손을 놓지 않으시고 다시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이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에 속한 자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해 주려 하고 목말라 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나의 죄를 사하시고 새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만의 거룩하고 영원한 계획으로 인도하셔서 지금도 그 약속을 하나하나 이뤄나가시는 은혜를 앎으로 되어지는 심령의 상태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고 있었던 나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독생자 아들의 피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주신 그 은혜를 알게 됨으로써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일생을 두고 가져야 할 소원은 예수님의 의가 끊임없이 자신의 속에서 자신을 간섭하고 살피게 해달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3. 신자의 배부름은
많은 사람들은 신자가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실 큰일을 소망하고 실현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신자에게 더 근본적인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끊임없이 예수님의 거룩한 의가 자기 심령의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간섭하고 파헤쳐주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부끄럽고 더럽고 추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 심령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미치도록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일에 목말라 하면서 주의 자비가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고백이 순간순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부끄러움과 더러움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오히려 부끄러움과 추함을 감추기 위해 세상의 것으로 무장하려고 힘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곧 배부름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세상에 취한 채 살다가 저주의 사람으로 죽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능하고 나약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소원은 있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한 소원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간섭하시면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되도록 일하실 것입니다. 결코 세상의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세상의 것은 우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세상이 우러러보는 의인이나, 위인,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움을 맛보아 알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우리의 존재와 삶 그리고 신자의 일생 전부를 내어 던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절망의 그림자가 인생을 덮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더 크고 신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간섭하고 계심을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하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한 무엇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함으로 자기의 세상적, 인간적, 도덕적, 종교적 의를 채우려는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배부름이라는 복된 상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항상 배고플 뿐입니다. 이것은 기도한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곧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세상이 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명예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인된 자에게는 생명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바라보는 신자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배부름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배부름입니다.
1.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마름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천국은 어떤 나라라 하며 또 그것은 무엇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사람이 자신의 선행에 붙들려 있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런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5. 사람들이 예수님의 의에 대하여 주려 하거나 목말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신자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가 되기 위해 행하는 스스로의 노력은 어떤 것들이라고 합니까?
7. 신자들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는 어떻게 주어진다고 말씀합니까?
8. 신자가 일생을 두고 가져야 할 소원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 신자에게 주님의 거룩한 의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싫어하는 인간이 거부하며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자기 생명을 바라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신자의 배부름은 무엇이며 왜 그런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