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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심령이 가난한 자

본문 / 마 5: 3

 

1.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

예전에 1999년이 끝나고 2000년이 시작될 때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전 세계가 흥분하고 떠들썩하던 모습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2000년이 시작되면 뉴밀레니엄 시대니 또는 새천년 시대니 하여 마치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지만 그로부터 25년이 지나고 바라보는 지금의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즉 사람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불과할 뿐이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없습니다. 1년 후든 100년 후든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세월이 흘러가면서 문명과 문화는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껍데기의 변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흔히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고 옷을 달리 입으면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껍데기의 변화일 뿐, 그 알맹이는 썩어져 가는 육신 그대로일 뿐입니다. 즉 무엇을 해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도 사람도 이 본질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 모여들어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았거나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병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불행의 요소입니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병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지금껏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그 불행의 요소가 사라졌고 건강한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기대하겠습니까? 병든 몸으로 살아왔던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병든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과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병든 몸으로 살아갈 때는 고통과 불행만 있었는데, 병이 사라지면 고통과 불행이 사라지고 행복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병으로 인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사람은 그러한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더 나은 환경과 삶을 요구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병 고침을 받고 또는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오늘 본문인 심령의 가난입니다.

세상의 누구도 심령의 가난을 복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혹 심령의 가난을 마음의 깨끗함으로 해석하여 인격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내면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지 몰라도 심령이 가난한 것 자체를 복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세상의 발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배제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든 사람이든 현재보다 더 나아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끝없이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야망이 요구되는데, 심령의 가난에는 그러한 야망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 심령의 가난과 인간의 실상

그러면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령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 즉 세상의 모든 것은 공허한 것이기에 집착을 버리고 욕심이 줄어드는 심령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심령의 가난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욕심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욕심은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든 포기하지 못하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 욕심이 더하고 덜하는 차이는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욕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욕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심령의 가난은 죄와 연관하여 이해해야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전혀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잘못한 것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허물은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선행을 행하며 덕을 쌓으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의 개념이 다른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를 믿어야 죄가 용서되고 천국 간다’는 말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지금 자신의 죄가 이미 이천 년 전에 사형을 받아 죽은 예수라는 인물을 믿음으로 용서된다는 말 자체를 기독교가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억지 정도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인이라는 것을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죄 된 행동을 했는가로 규정합니다. 반대로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고 선행을 하면 의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은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죄 가운데 있는 존재이기에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즉 죄인이기에 죄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지 죄의 행동을 했기에 죄인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는 다른 죄의 개념입니다.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자신이 죄를 범하게 된 것을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이 좋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압니다. 죄인인 인간은 환경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악은 기회를 틈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본질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권면이나 목사의 그 어떤 설교로도 인간의 죄의 본질을 교화시키거나 바꾸지를 못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에 대한 교화도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뉘우치게 하는 것 정도일 뿐이지 사람 자체를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에 따른 규범을 교육시키고, 종교적인 삶을 실천하는 훈련 등도 죄의 행동을 억제하는 효과는 있을지언정 사람 자체를 변화시켜서 죄에서 멀어진 자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부패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8-31)고 합니다.

인간에게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라고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악하고 더러운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궁극적 원인과 책임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져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심령의 가난이 죄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깨닫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올 것은 죄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등 모든 것이 자신이 악한 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자아가 온전히 무너져 내릴 때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너짐이 없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죄인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죄인이라는 고백은 할지언정 의의 자리에서 타인 위에 군림하려고 할 뿐입니다.

 

3. 자기 실상을 바라보라

신자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너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의가 어떤 가치로 주어진 은혜인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는 생각이 그동안 교회에서 들어온 지식에 의한 것일 수 있고 또는 남보다 못한 종교적 행동에 대한 죄책감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보다 못한 누군가를 보게 되면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자신은 죄인의 자리가 아니라 의의 자리에 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인간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면 신자가 주님 앞에서 쏟아 놓을 것은 죄의 고백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죄밖에 없는 인간이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무엇을 내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죄가 죄 없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심령의 사람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최고의 기쁨은 두말할 것 없이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 기쁨을 예수님을 좇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에게 예수님은 심령의 가난이 복이라는 새로운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새로운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곧 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어떤 기쁨을 경험했습니까? 물론 신자인 우리는 구원받은 기쁨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진심으로 실감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 세상의 그 어떤 기쁨보다 더 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은 신자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이 기쁨이 우리와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심령이 가난해 진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밑바닥 실체까지 내려가서 자신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가지고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말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어떤 장담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난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과 자신의 행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절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에게 남는 것은 자신감도 아니고 자기 신앙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일 뿐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경험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죄인이라고 하면서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겸손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 후의 삶은 여전히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삶이고, 겸손보다는 교만만 보입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이 되면 또다시 같은 기도를 반복합니다. 문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해달라는 기도만 있을 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자신의 악함에 대한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도 또한 형식적이고, 신앙적인 기도를 하기 위한 쇼로 그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헛된 신앙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주 앞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자리에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간절함이 있는 심령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복되고 좋은 날들이 되실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많은 세월이 지나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사람들이 언제나 더 나은 삶과 환경을 요구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불신자들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세상의 죄의 개념과 성경의 죄의 개념이 어떻게 다르다고 말씀합니까?

 

5.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심령의 가난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6. 입술로만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라고 말씀합니까?

 

7. 신자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을 만나려면 어떠해야 하며 왜 그래야만 한다고 말씀합니까?

 

8.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신자가 자신이 받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우리에게 신앙적 고백과 기도는 있으나 여전히 삶에서는 예전과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겪어야 할 복된 삶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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