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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본문 / 11:31-37

 

1. 우리의 신앙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자비, 긍휼이고 우리가 많이 말하는 것도 역시 사랑이며 자비하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우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여지는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형편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 힘든 일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병든 것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병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은 나사로가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이것 하나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을 몸입니다. 썩어질 몸이고 실제 썩어져 가고 있는 몸입니다. 따라서 썩어질 몸으로 사는 사람의 몸이 병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죽는 것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병들게 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미 병든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 역시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그 사랑과는 상관없이그 몸은 병이 들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질병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아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질병과 상관없이 살고 설사 질병에 걸렸다고 해도 사랑이 우리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육신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런 사랑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전할 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11: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뒤에 찾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은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켜 주시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병에서 고침받는 것과 사망에서 건짐받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은혜로 여겨집니까? 당연히 사망에서 건짐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큰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병든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무덤에 있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병은 고침 받아봐야 또다시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예수님의 사랑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라면, 결국 그 사랑도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부족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자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라는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무엇을 가지고 오셨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원망이요 불평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육신의 문제로 인해서 예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때가 많습니다. 설령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엇을 위해서 오셨는가를 배워서 안다고 할지라도 내 속마음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일 때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되 자기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믿음의 실상이고 또 우리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믿음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2. 눈물 흘리신 이유

오늘 본문 앞에 20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러 나갈 때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마르다가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소식을 전하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32절에 보면 마르다와 똑같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32)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33절에 보면 마리아가 울면서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 하니까 아마도 주변에 마리아를 따라온 유대인들도 같이 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5)는 말씀대로 예수님도 함께 우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울고 유대인들이 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도대체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를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결코 마리아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오라비의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유대인들은 그러한 마리아가 불쌍히 여겨져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처럼 마리아가 불쌍해서 아니면 나사로의 죽음이 슬퍼서 우신 것입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울음의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나사로의 병을 고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일부러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울음의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임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11:36)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나사로를 많이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이것은 뒤의 말로 알 수 있습니다.

37절에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11:37)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소경의 눈도 뜨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사로의 병쯤이야 충분히 고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뒀다는 것은 예수가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는 뜻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6절의 말은 나사로를 사랑하니까 운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자체를 의심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죽게 내버려 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식의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만나도 내려주신 분임을 압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기적으로 도우시고 그들을 살리셨으니까 나에게도 같은 기적을 베푸셔서 나를 도우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돕지 않으십니다. 도우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되어질 일인데 돕지 않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도대체 나를 사랑하신 것이 뭡니까?’라는 반발이 앞서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흘리시는 눈물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마리아의 울음에 마음이 감동되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데 그저 마지막 날 다시 살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부활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에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수준의 믿음에 대해 통분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3. 우리가 흘릴 눈물

마르다나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이것은 그들의 삶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으로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이것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르다와 마리아로 인해서 예수님이 눈물 흘리신 것처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서 입술로만 주를 부르고 주를 말하고 있다면 오늘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나중에 멸망으로 가지 않고 영생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마지막 날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을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와 같은 수준입니다. 구원은 지금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나로 인해서 흘려지는 예수님의 애통의 눈물이 그 시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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