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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온유한 자

본문 / 5: 5

 

1. 어리석은 생각

우리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온유하다는 말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친절할 뿐만 아니라, 부당한 일을 겪어도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양보를 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성격이 급하고 거친 사람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신자답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시각일 뿐입니다.

성격이나 기질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타고 납니다. 물론 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격과 기질을 두고 좋고 나쁜 것으로 구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거칠고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더 좋고 유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좋은 성격이고 거칠고 급한 성격은 나쁜 성격이고 그래서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구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격으로 사람을 좋다 나쁘다고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모든 죄수들이 거칠고 급한 성격의 사람들이겠습니까?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남을 속일 수가 있고, 도둑질도 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 급한 성격의 사람이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나 동일하게 시기와 미움도 가지고 있고 또한 욕망도 동일합니다.

간혹 뉴스를 보면 끔직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 잡혔을 때 그를 아는 주변의 사람들이 저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런 일을 할 수가 있나?’라고 놀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동네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났는데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들을 보이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인식에 착한 사람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나쁜 사람은 거칠고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생각이 굳어 있기에 나오는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속에 인간의 악한 본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인간의 악한 본질이 있다고 해도 거칠고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큰 착각이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악함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큰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처럼 나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니까 성격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저런 사람보다는 저 신자답다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칠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신의 성격이 타인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신자답지 못합니다라면서 항상 자기 부족을 생각하며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신의 성격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격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거칠고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의도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한 온유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나 기질로 이해를 한다면 결국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상한 뜻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한 온유한 자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타고난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온유만이 아니라 팔복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팔복은 성격과 기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중심 주제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팔복을 통해서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병이 고침 받고 환경이 좋아지는 그런 복이 아니라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복으로 가득한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신자는 바로 이러한 복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온유는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되는 것

민수기 12장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는 온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모세는 애굽의 관원이 자신의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관원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또 민수기 20장에도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죽겠다고 모세를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을 모으고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0:10-12)고 합니다. 모세가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모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성격이 급하고 거친 면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세상 누구보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온유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일에서 드러납니다. 구스 여인은 에티오피아의 여인으로서 흑인입니다. 아마 애굽의 노예로 있었다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함께 나온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어쨌든 구스 여인은 노예로서 천대받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여인을 모세가 아내로 취한 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모세에게는 체면이 손상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모세는 구스 여인의 신분, 즉 외적 조건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을 합니다. 자신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 더군다나 천한 여자인 구스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의 위신을 손상시킨 일에 대해 비방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합니다. 이것은 단지 모세를 비방한 것에 대한 징계가 아닙니다. 문둥병은 부정하고 더러운 병입니다. 즉 하나님은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함으로써 미리암 너도 결국은 더럽고 부정한 인간일 뿐이다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그때에 아론이 모세에게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12:11-12)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지만 아론은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암과 같이 모세를 비방한 처지에서 미리암의 문둥병을 바라볼 때 자신도 문둥병 걸린 미리암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하면서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천한 자 높은 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아론의 고백처럼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온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온유는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앎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온유는 예수님에게서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곧 마음의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 쉼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온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온유는 한마디로 하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참여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귀함을 드러내고 세상의 중심에 자리하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우리가 죄 없는 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 없는 자라는 복된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 되시고 가장 존귀한 분이 되시는 아들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본래 형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고, 저주 아래 있었고, 부정하고 더러운 자였던 우리의 본래 형편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의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또 세상의 것을 갖추어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악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신자가 자기 자신을 아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이런 우리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의 저주를 끝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온유입니다. 즉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참여됨으로써 사랑의 증거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온유는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서의 성공과 잘남이 아니라 나를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게 합니다. 그래서 온유는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유를 배운 신자는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온유한 자의 복

오늘 본문에 보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복은 보상 차원의 상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온유한 자로 살았기 때문에 땅을 상으로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땅이라는 것이 부동산의 의미의 땅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이 부동산이라면 땅 부자는 모두 온유하다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동산을 복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땅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의 땅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그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답지 못할 때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답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면서 기업의 많고 적음을 따라 힘 있는 자와 약자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가 존재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약자를 무시하고 억압함으로써 하나님의 동행에서 멀어졌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리고 있음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쫓겨난 것처럼 되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선물 받은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정죄가 없고 심판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언약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거하는 신자에게서는 온유가 그 특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 땅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땅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모두는 이 거룩의 특성을 드러낼 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온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자가 동일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함께 한 그 자리에서는 주님으로 인한 거룩과 은혜만 높임 받을 뿐이지 나는 높임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땅을 살아가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나는 누구이고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나라의 백성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의 성격과 기질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신앙적 시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2. 민수기 12장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하는 말씀에서 모세의 온유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함과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3.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4.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를 향하여 비방한 미리암에게 하나님께서 문둥병에 걸리게 하신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마태복음 11장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온유는 무엇이고 또 반대로 교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답지 못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8. 오늘날 믿는 신자가 받은 땅은 무엇의 의미하며 또 그 땅을 받은 신자의 삶은 어떤 삶이라고 말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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