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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본문 / 5: 8-10

 

1. 어떤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처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반응은 냉랭할 뿐입니다. 즉 세상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보다는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원하고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6:14)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 보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엘리야로, 어떤 사람에게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였습니다. 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가 각기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인물들이었고 능력자였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능력을 확인했고, 그 능력을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같은 능력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베드로의 고백을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고백으로 인정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는 사람들의 시각은 혈육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와 같은 존재로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오신 분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단지 신적인 능력만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증거하실 때 말씀으로도 하셨지만, 기적을 통해서도 증거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을 하지 못하고 하늘로써 오는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확신할 수 있는 분명한 표적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통해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하시는 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서 예수님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기대하고 보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신 일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는 능력이 있는 선지자처럼만 보였을 뿐입니다. 육신에 매어 있는 인간에게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육신에 도움을 주는 능력자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육신에 도움을 주는 예수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입니다.

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을 하겠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어떤 병도 낫게 하는 능력자이십니다라고 답하기도 할 것이고,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주입니다라는 답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영광에 매어 사는 인간의 욕망이 기대하는 예수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줄 예수님입니까? 우리도 그 당시 이스라엘과 똑같이 우리의 삶의 문제, 즉 지금의 어려움과 힘든 문제에 예수님이 와 주시기를 기대하고 원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데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죄인된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만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로 영원한 멸망에 처해 졌어야 함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은 큰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은혜가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실체, 즉 영원한 멸망에 처해 져야 할 것이 나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멜기세덱의 반차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10)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반차라는 것은 족보, 계통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심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란 말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에 의해 붙들려 갔을 때 아브람이 소수의 군사를 모아서 그들을 뒤쫓아 가서 치고 롯을 구해올 때 멜기세덱을 만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멜기세덱에 대해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14:18)고 합니다. 멜기세덱을 살렘왕이라고 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을 만날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직을 역할을 두고 보면 멜기세덱의 이 같은 행동은 제사장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4장에서의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면서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편에서 아브람을 축복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제사장의 역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사장직의 모습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고난과 속죄 희생입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서는 그같은 고난과 희생의 죽으심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고난과 죽으심만을 보지 말고, 승리와 축복까지 함께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고난과 희생 그리고 죽으심만을 보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일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의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신자에게 멜기세덱 반차를 따라오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난과 어려움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오신 예수님은 신자가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기어코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힘주시고 도우시며 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어떤 일에서든 낙심치 말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3. 신자는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이고,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고난 받으셨던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다면 우리 역시 결국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위로이며 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세상의 삶이 어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승리인 것입니다.

신자는 땅이 아니라 위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1-3)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신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는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다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의 못남과 우리의 더러움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늘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떼어내지를 못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성품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그렇게 일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의 삶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포기한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필요한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 나를 단련하시고 훈련 시키시면서 정금 같은 신앙으로 새롭게 나오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영광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힘이고 위로일 것입니다.

신자는 실패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능히 성취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고난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어떠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오실 것임을 믿는다면 기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낙심치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 앞에 멜기세덱이 반차를 따른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를 의지하고 주를 믿으며 사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가든 거기에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신자의 힘이며 위로로 자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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