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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두 증인의 승리

본문 / 11: 7-13

 

1. 증인의 삶

신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내용을 취하거나 또는 버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인정해야 하고 믿어야 할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조물된 인간은 창조주의 말씀이라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성경 앞에서 우리 자신의 기분이나 손익 여부를 따지며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고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입장과 처지와 상황에 맞추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설사 우리의 입장과 바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자된 위치에서 말씀을 대하는 이상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을 보다 보면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보다는 성공을 원하고, 약자이기보다는 강자로 존재하고자 하고, 무시 받고 조롱받기를 거부하고,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오히려 타인이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힘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성경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고 부인하고 피하고 싶은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이상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말씀이 곧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적어도 지난주에 나누었던 5절과 6절의 말씀을 대했을 때까지만 해도 증인, 곧 신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힘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냐하면 지난주 말씀인 5절부터 보면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11:5-6)고 하여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승리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만을 대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여기서의 '그들'이란 두 증인을 의미합니다. 증인된 자에게 이러한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를 해하고자 하면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만을 대하면 신자는 마치 세상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누구든 신자를 조롱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고, 신자는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만 하도록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두 증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대하면 두 증인은 누구도 해할 수가 없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분명 누구든 저희를 해하고자 하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을 했는데, 왜 그러한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볼 때 증인에게 주어진 권세, 즉 저희를 해하고자 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힘을 드러내는 권세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이 많이 가지는 불만은 믿음에 대한 결과가 육신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내 곁에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옷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면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메이커냐 아니냐, 멋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은 사실상 옷의 기능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메이커든 아니든, 비싸든 싸든, 멋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겨울에는 따뜻하면 그것으로 최고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메이커나, 유행이나, 멋을 따져 가면서 옷을 고르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타인이 내 옆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좋다고 인정하고 갖고 싶어하는 옷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존심을 세우고, 타인의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타인이 없고 나 혼자 존재한다면 과연 그러한 것을 따지며 살아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좋은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말고 하늘에서 주어지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것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좋은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 주어진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쉽게 밀쳐 버릴 수 없는 유혹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복을 원하는 것도 결국은 그 복으로 인해서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 영생, 예수, 십자가, 이런 것들은 타인에게 과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별 흥미를 느끼지를 못하면서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있는 명목상의 신자라면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무한하고 영원한 놀라운 복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에 처해지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그것을 넉넉히 이길 수가 있어 진다는 신자의 비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받기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 받은 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라는 이 이치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복이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결과와 대가가 없다 할지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미 귀한 것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달리 기대하는 좋은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사 중에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고 하고, 2절에서는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3절에서는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뺐지 못해,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송가대로 과연 우리들 가슴속에 주 예수님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분으로 자리하고 계십니까? 세상 그 무엇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 갈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크신 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된 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 은혜를 귀하게 여긴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는 작게 여겨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벌고 싶어서 애를 쓰는 돈이 예수님보다 크게 보이는가 아니면 작게 보이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고생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죄를 대신해서 피조물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피 흘리신 그 고통과 고난보다도 작게 여기며 살아가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 마음에 주 예수님이 귀하시고, 크신 분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세상은 자연히 작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작게 보이는 세상에서 어떤 대가나 보상이 없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2. 증인의 죽음

오늘 본문에 보면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11:7-8)고 말합니다. 증인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계시록 131절에 보면 바다에서 한 짐승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온 땅이 이 짐승을 경배합니다. 짐승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짐승에게 패배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짐승에게 지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다니엘서 7장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네 짐승이 세상에 일어나는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꾼 꿈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서 계시하신 장차 되어질 일은, 세상에 네 왕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힘센 한 왕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핍박하고 파괴하고 짓밟는데 그 기간이 한때 두 때 반 때라고 말합니다. 한때 두 때 반 때는 마흔두 달입니다.

그리고 마흔두 달은 계시록 112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방인이 거룩한 성은 짓밟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3절에서 말하는 두 증인이 예언을 하는 일천 이백육십일과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말씀을 두고 볼 때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된 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삶이란 결코 세상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구조는 증인의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거하는 증인을 짓밟고 핍박하고 조롱하고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꿈으로 통해서 계시된 세상일이고, 요한의 환상을 통해서 계시된 세상일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한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을 굴복시키는 증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의해서 무시되고 조롱받는 증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된 자에게 부담이 되고 난처함을 주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복음을 가졌다고 해서,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을 굴복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원하는 승리가 보장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 7장에 보면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7:25)고 말합니다.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성도의 믿음이 세상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힘으로 드러나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세상에 붙인 바 되어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는 기간입니다. 그러한 때를 살고 있는 것이 신자인데 어떻게 하나님 덕분에 세상 사람들 위에 힘 있는 자로 군림하는 성공을 꿈꿀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란 세상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서 세상에 조롱을 받고 무시 받음을 통해서 세상이 어둠에 속했으며 멸망에 처한 존재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은 짐승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증인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는데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며, 애굽이라고 하는데 곧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은 골고다입니다. 그런데 증인의 시체가 있는 곳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으로 말하고 그것을 애굽 또는 소돔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증인된 자가 증거로 인해서 조롱을 받고 무시를 받는 그 현장이 곧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고 애굽이고 소돔이라는 것입니다. 즉 멸망의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을 하면 자연히 자신들의 위신이나 종교적 자존심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힘 있는 자로 군림하는 구원을 원했습니다. 비록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참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종교적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 모든 나라 위에 힘 있는 이스라엘로 굳게 서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가 등장을 했는데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조롱받고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한다면 세상은 유대인을 조롱할 것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내세웠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가 겨우 목수에다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는 거지같은 존재냐?'라는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힘 있는 자에 속하면 그에 속한 자 역시 힘 있는 자로 대우를 받지만, 힘없는 자에 속하면 그 속한 자 역시 힘없는 자로 무시 받는 것이 세상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힘 있는 자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힘없는 자로 오셨습니까? 분명히 힘없는 약자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약자에게 속한 신자인 우리는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힘없는 약자로 대우받고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으로 부름 받은 신자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기를 거부하고 무시 받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대우받고 힘 있는 자로 존재하려고 한다면 그는 증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증거 하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힘 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그리스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의 조롱과 신자의 승리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11:9)고 말합니다. 여기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고 구경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증인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군사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고 조롱을 합니다.

이것은 군사들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조롱이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기대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따르던 예수님이 하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을 벌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것에 대한 실패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그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것에 대한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의 시각으로는 실패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메시아라 했던 그의 모든 말이 거짓이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예수님을 살리십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승리자임이 증거된 것입니다.

결국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장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네가 믿는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 예수가 너도 부활시키나 보자'라고 조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흘 반이란 하나님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지는 것 때문에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네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라고 조롱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구해내야 당연하지 왜 죽게 하느냐고 조롱을 하는 것처럼,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시고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왜 믿음으로 살겠다고 애쓰는 네가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을 하는데 도와주지 않느냐?'라는 조롱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구경하는 사흘 반의 기간에 해당 되는 바로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어려움에서 벗어남으로서 '봐라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자신의 백성을 이렇게 도우시지 않느냐?'는 사실을 증거 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려움을 당한 우리를 어려움에 그냥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믿는다는 것이 헛된 일인 것처럼 보여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증인의 죽음을 온 세상이 기뻐하고 예물을 주고받으면서 우리가 승리했다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신자의 어려움을 즐거워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는 부활하심이었던 것처럼 신자의 승리 역시 부활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부터 보면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1-12)고 합니다.

죽임을 당한 증인들이 그리고 시체마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된 증인들이 삼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옴으로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음성이 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증인을 죽인 원수가 구경을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조롱하고 무시하던 자들을 이기는 것 그러나 이것은 삼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다시 살아났을 때 되어질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리가 하늘로 가게 될 때 되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가치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동안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무시 받도록 세상에 붙인바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과 무시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가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롭게 되어진 주의 백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의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만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감으로서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비록 초라하게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임으로서 무시도 받고 조롱도 받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증인은 바로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 날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낙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기는 자로 남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믿음을 가치 없이 본다고 해서 우리까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이 오시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증거 삼아 하늘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이 우리들에게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2. 증인의 권세가 세상에서 힘을 드러내는 권세가 아님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3. 신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별 흥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신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5.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을 어떤 기간 때라고 말씀합니까?

 

6.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으로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무시당함으로 살아가면서 드러내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 본문에 증인의 시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말하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8. 신자가 예수님에게 속했으면서도 세상에서 조롱받고 무시 받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대우받고 힘 있는 자로 살아가길 원할 때 증거되는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9.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장사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의 증인의 승리는 무엇이며 또 그것은 오늘날의 신자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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