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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라

본문 / 4:39-42

 

1.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앎은 지식적인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과 믿음과는 별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짐으로 그만큼 믿음이 자란다면 성도는 믿음을 위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믿음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으로 성경을 공부한 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3장과 4장에서의 등장인물은 각기 상반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3장의 니고데모는 성경 적인 지식이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엘리트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4장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볼 것 없는 가장 밑바닥의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에다가 무시 받고 살아가는 여인의 몸이었으며 더군다나 창녀나 다를 바 없는 행실을 가지고 있던 여인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세워놓고 누가 천국 가겠는가?’라고 물으면 과연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물론 천국 가는 조건이 무시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없고 또 니고데모처럼 엘리트여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다 또는 사마리아 여인이다라는 답을 우리 스스로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을 놓고 누가 천국갈 가능성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생각은 니고데모에게로 많이 기울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는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두고 구분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행실이 나쁘고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과 아주 착한 사람을 두고서 그 두 사람 중 누가 예수님을 믿기가 쉽겠는가?’라고 묻는다면 평소 배운 지식으로는 모두가 악한 죄인인데 믿기가 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는 답을 하고 있을지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도둑질을 일삼는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자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기가 쉬운 사람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믿기가 어려운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믿기가 쉬운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애당초 사람의 본바탕이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눈 요한복음 3, 4장은 믿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3장에서는 믿음에 대해서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누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 대해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갑자기 하나님 나라를 누가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니고데모의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은 오직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엘리트에게 믿음은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을 모두 무너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것도 행실이 아주 나쁜 여자를 말입니다. 비록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도 동네에서 존경을 받는 착한 사람을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다섯이라고 할 수 있는 창녀 같은 행실을 가진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는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을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듭남을 말씀 하심으로서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믿음에 대해서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이 보이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서 결국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이 믿을 자와 믿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구분은 하나님이 택한 자냐 아니냐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제자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대인이 왜 나에게 말을 거느냐?’라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그가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물동이도 버려둔 채 동네로 뛰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스스로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믿게 되어진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거두어진 알곡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알곡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알곡이 되어져 추수되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서 니고데모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인 제자들까지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한 그 일이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닌 방법으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만나서 하신 일은 단지 대화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머리에 손을 대시고 안수를 하셨다거나, 천사를 보여주셨다거나,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믿게 하는 정도의 일은 특별한 이적을 행하지 않고 다만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말씀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나쁜 사람은 말로만으로는 안되니까 다른 특별한 이적을 보여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은 뭔가를 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목격함으로서 믿음이 있어 진다면 아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거두기 위해서 수고하실 때 제자들은 다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뭔가를 보면 믿음이 더 자랄 것 같은 생각을 가지지만 그것은 믿음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꿈에서 뭔가를 봄으로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뭔가를 본 자신을 믿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꿈을 꾼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고 경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신자의 증거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39-42)고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서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은 예수라는 사람이 마치 족집게 점쟁이처럼 내가 어떻게 행하고 살았는지 모든 것을 다 알더라면서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증거한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이 있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단지 자기의 경험만을 가지고 믿는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전 처음 본 여인의 행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신비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능력을 의지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실을 다 아는 예수님이 신비하게 보여질 수 있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이 있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알고 있는 신비함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까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신비한 능력이 있으니까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를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실을 능히 아실 수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차원에서 증거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로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개의 간증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개의 간증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경험한 경험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암이 나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내 암을 낫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요 능력이다. 여러분도 기도하라. 그러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암이 나았다는 신비한 경험을 강조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암이 나은 신비한 이적 뒤에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간증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어떠한 간증을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암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도 포기한 암이 나은 것을 보니까 역시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을 낫게 한 그분은 바로 우리의 생명까지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3. 주를 만난 자

여인이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신자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모든 일이 마무리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과 이틀을 유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예수님에게 자기들과 함께 유해주기를 원했을까요? 그냥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까 믿는 자로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유하시면서 무엇을 하셨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41)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동네에 유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증거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듣기를 원해서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볼 때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싫어하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과연 그러한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생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는 누가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가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더 깊이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 42절에 보면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42)고 말합니다. 이들의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은 여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친히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들음으로서 예수가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여인의 증거를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예수가 세상의 구주이신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은 곧 그 누구의 힘이나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하여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는 이것이 바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진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믿음은 믿음이 있는 자를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앎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곧 믿음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예수 믿으라는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되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해놓고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를 증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목사의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는 다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것이지 믿게 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목사의 설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우리의 논리와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아무리 성경을 잘 풀이하고 논리적으로 설교를 잘한다고 해도 목사의 설교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진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말씀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의 증거로 인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지고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게 하고 말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되어진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들을 믿게 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소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려 하고 있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로 되어졌음을 증거하고 또 말씀으로 되어졌음을 증거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던 여인에게 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말을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에게서 보여지는 참된 증거입니다.

인간적 시각에서는 도저히 믿음의 가능성이 없는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진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음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상의 구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우리가 증거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되어졌음을,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도 아니고 그 누구의 수고도 아니고 오직 말씀으로 인하여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증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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