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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자에게 확실한 것

본문 / 11:15-19

 

1.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서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만큼은 전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자기 자신'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 마음먹고 목표로 세운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을 진행 함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처음의 생각대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항상 주변의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변동되고 굴복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 몇 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비록 숨을 쉬고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란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학은 확실한 것입니까? 과학의 발전이란 항상 현재의 것에 대한 확실함을 부인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현재의 과학에 대해서 비판하고 부정함으로서 발전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발전되는 것이 과학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확실한 과학이론이 내일이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아니라고 부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술 문명 역시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는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무엇 하나도 '확실하다'는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확실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믿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의지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믿을 것이 있다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결국 세상에서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라면 우리는 나도 믿지 못할 존재임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온통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무엇하나 믿을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믿고 삽니다. 돈을 믿고 삽니다. 형제나 친척 중에 권세 있는 자가 있을 때 그 사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힘이고 돈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힘이라는 것도 권세라는 것도 돈이라는 것도 나무에 달려 있는 잎사귀 같은 것이고, 뜨거운 여름날의 손바닥 위의 얼음덩이 같은 것입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떨어져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고, 찬 기운을 내 뿜으면서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얼마 후면 형제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있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1억이 있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제 있었던 1억은 어제 나에게 힘이 되고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이지, 오늘 내 손에 없다면 어제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잘 나가고 있다는 것도 언젠가는 과거의 일로 지나가 버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10년 전만 해도 잘 나갔다'는 것이 과연 현재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지 마십시오. 단지 스쳐 지나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2. 신자의 일

이처럼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 오늘 본문은 확실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을 확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심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이라면 분명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항상 변동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처음 세우신 목표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심판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신자이고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것 하나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마음에 확실한 것이 있습니까?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지는 천국 영생을 확실한 것으로 믿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믿어집니까? 우리가 믿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확실한 것입니까?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믿기 보다는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보다 돈이 의지 되고 있다면 그것은 천국은 불확실한 것으로 돈은 확실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돈은 지금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또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천국이 지금 나에게 행복을 주고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천국보다는 돈에 더 확실성을 두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무엇이 확실한 것입니까? 심판이 확실합니까? 아니면 세상이 확실합니까? 예수님이 확실합니까? 아니면 돈이 확실합니까? 사람은 자신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까?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11:15)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음성이 요한에게 들리기를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핍박을 받고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즉 고난과 환난 속에서 이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에게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시면 이 세상이 주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에게는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지금은 고난 속에 있다고 해도 장차 세상 나라가 주의 나라가 된다는 것에 확실성을 두고 있다면 현재의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오시면 자신의 고난은 사라지고 주와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지금의 고난에 인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 대우받고 권세 있는 자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결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세상이 장차 주의 나라가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확실함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 능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두 증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증인은 말씀을 증거 함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시체마저 구경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오자 그들은 살아납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에 의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온 세상은 두려움 가운데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두 증인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증거한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다는 것보다는 다시 산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조롱이나 무시를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결코 대충 믿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확실한 진리 하나 붙들고 그 진리 하나 때문에 기뻐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소리를 한다고 해도 변함이 없이 끝까지 확실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삶이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확실한 진리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나에게 가장 확실한 분으로 알고 그리스도 한 분으로 내 마음이 채워진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나라가 장차 주의 나라가 된다는 말이 세상의 시각으로는 허황된 말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날이 되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확실한 것으로 알고 믿고 사는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확실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11:16-18)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십 사 장로들의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에 대한 찬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찬양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이 땅에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세상에서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앞날을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세상일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만이 확실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믿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을 확실한 일로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주의 일

그 확실한 일이 오늘 본문 19절에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1:19)고 합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의 일이 감추인 것이 없이 모두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그리고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번개 음성 우레 지진 우박이 있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언약궤와 함께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언약궤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지성소의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는 제물의 피, 즉 속죄를 근거로 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언약궤에는 구원은 오직 어린양의 피에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열리고 언약궤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코 포기되어지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일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일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담겨 있다면 이 세상의 일은 우리의 마음에 끌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일은 아무리 확실하게 보인다고 해도 불확실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오직 하늘이 열리고 보여진 하나님의 일만이 가장 확실한 일로 이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바로 그 일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만을 가까이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2장에 보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2:12)고 말합니다.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아들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입 맞춘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일 때 가능합니다. 즉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아닌 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분이라는 관계에 있는 자가 예수님에게 입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 한 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가득찰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확실한 것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고민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자인 것입니다.

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우리의 삶이 과연 그러합니까? 확실한 것을 마음에 담고 그리스도라는 한 분을 마음에 담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진노하시고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십 사 장로들처럼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불확실한 것은 무엇이고,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고,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한 심판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앎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그 은혜를 찬송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주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5-6)고 말씀합니다. 여기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제사장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나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힘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힘을 얻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힘없는 자는 무시당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아무리 믿음이 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라고 해도 세상 나라에서는 힘이 없으면 믿음도 조롱을 받고 무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힘이 있는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기죽기 싫고 조롱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에게 입 맞추지 않고 세상과 함께 살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주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주님의 희생으로 사는 나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희생을 무시하고 힘을 추구했던 모든 세상 나라는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이 없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잘것 없어 보이고, 주님을 사랑함이 쓸데없어 보임으로 인해서 조롱을 받는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하나님이 일이 이루어질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세상을 망하게 하시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조롱을 받되 낙심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없되 비굴하지 않습니다. 보잘것 없이 보이고 쓸데없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신자는 가장 확실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 확실한 것이 담겨져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불확실성의 시대에 확실한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다고 말씀합니?

 

3. 천국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까지도 여전히 돈을 의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주의 언약을 확실히 믿고 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5. 오늘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는 왜 오늘 본문의 이십 사 장로와 같은 찬양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6.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확실한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 본문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 안에서 신자의 확실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런 신자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우리가 오늘 본문의 이십 사 장로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때는 어느 때라고 합니까?

 

10. 신자가 힘으로만 살아가는 세상에서 힘이 없어 조롱받고 또 믿음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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