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904
오늘 : 170
어제 : 286

페이지뷰

전체 : 78,733,516
오늘 : 776
어제 : 1,883
조회 수 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두 증인의 권세

본문 / 11: 3- 6

 

1. 가치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반대로 가치 없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누구나 가치 없는 인간이기보다는 가치 있는 인간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우리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은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사람을 가치 있는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윤리나 도덕 또는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에 인간의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인격입니까? 아니면 윤리 도덕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 또 뭔가를 추구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산다면 그 이유는 추구하는 그것이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돈이 있어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고, 평소 인격을 쌓으려고 하거나 윤리와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면 그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은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취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버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취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우리에게서 과연 버려지는 것은 무엇이고 반대로 취해지는 것은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우리에게서 버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고 반면에 취해지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저는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는 버려지는 쪽에 있습니까? 아니면 취해지는 쪽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그리스도를 인간 쪽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질문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질문을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그리스도를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자로서 성령이 함께한 신자라면 필연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가고자 애쓰는 삶이 있을 것이니만큼 과연 우리에게서 그러한 삶이 발견되고 있는가를 묻고 싶어서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다고 자신하는 그리스도가 과연 가치 있는 분으로서 우리의 삶에 자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그리스도께서 진심으로 우리의 삶에 가치 있는 분으로 존재하신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희생, 섬김, 사랑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김받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은 취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 희생, 섬김, 사랑 등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취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 받게 되었다'는 이 말을 우리는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진심으로 존귀하신 분이라면 그분의 피로 인해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 백성으로 여김 받게 된 것이 신자라면, 우리가 생각할 때 신자의 가치성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되십니까? 돈 많은 재벌이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신자가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신자가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의 입에서 '신자가 더 가치 있다'는 답이 내려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답을 내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입에서 존귀함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를 존귀하신 분으로 높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입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을지 몰라도 삶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을지 몰라도 삶은 점차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가 세상 무엇보다도 존귀하신 분이라고 할지 몰라도 교회 밖으로 흩어지고 나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을 내 삶에 존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실체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신자됨의 가치가 신자에 의해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자됨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자 됨의 가치보다는, 세상 속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존재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2. 증인의 삶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11:3)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합니다. 천 이백육십일을 예언한다는 것은 2절의 마흔두 달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흔두 달은 1260일입니다. 그리고 천이백육십 일이란 이방인에 의해서 거룩한 성이 짓밟히는 기간을 말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천이백육십일이란 심판이 유보된 기간을 의미하는데 그때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란 세상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고 합니다. 굵은 베옷이란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이 베옷을 입고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면서 심판을 외쳤습니다. 따라서 두 증인이 마흔두 달 동안 외치는 것은 세상의 심판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앞에서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고, 오늘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11:4)라고 말합니다.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합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스가랴에 나오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룹바벨은 왕이며, 여호수아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새 성전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증인으로서 해야 할 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각기 왕과 제사장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새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질 성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서 4장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고 말합니다. 결국 성전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성령으로 인해서 세워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바로 이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심판을 외치는 증인은 이미 구원이 확정된 자로서 외치는 것입니다. 구원이 확정된 자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두려울 것도 낙심하고 절망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으로 세움 받는 신자인 것입니다. 증인은 세상이 심판 받고 망한다는 것을 외치는 자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말을 하라고 있는 것이 증인이 아닙니다. 심판을 외침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기대하고 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심판을 받을 세상이기에 그 사실을 외치며 살아갈 뿐입니다. 신자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심판의 장소임을 보여주며 살아가라고 부름을 받았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증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입술로 심판을 말하는 증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인의 삶이 과연 오늘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이란 세상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임을 말합니다. 구원이 확정된 자로 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의 장소라는 것은 이 땅은 안주하고 정착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떠나고 피해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말하면서도 세상에서 떠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이 정착하고 안주하기 위해서 애쓰는 삶만 보인다면 그가 과연 증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삶이 세상의 심판을 말하지 못하는데 아무리 입술이 심판을 외친들 누가 그 말을 인정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조롱거리로만 남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이 세상이 심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심판을 보여주는 삶을 살면 살수록 세상은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라고 하는 우리 스스로가 증인의 삶에 대해서 조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우리 스스로 은혜를 조롱하고, 영생을 말하면서 우리 스스로 영생을 조롱하고, 심판을 말하면서 우리 스스로 심판을 조롱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입으로 주님의 은혜를 높인다고 해도 그 삶이 은혜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삶이라면 주님의 은혜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우리에 의해서 부인되고 조롱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지고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가리켜서 안개라고 하기도 하고, 풀의 꽃 또는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이것의 공통점은 세상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데 있습니다.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으로 비유하는 것은, 신자의 인생이란 세상에서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임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인생은 과연 어떻습니까? 떠나기 위한 나그네의 삶입니까? 아니면 정착하고 뿌리를 내려서 안주하기 위한 삶입니까? 예수님의 삶은 나그네였습니다. 세상에서 정착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바로 이것을 보이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서이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을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그 흔적은 삶을 통해서 묻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늘의 생명을 추구하고 살아가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영생이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고 또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영생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영생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입술은 주님을 따라가고 있지만 삶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 영생은 우리에 의해서 조롱을 받고 있고 버려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영생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영생이란 것이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신자 스스로 신자 됨의 가치에 대해서 조롱을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 됨이란 스스로 되어지고자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가치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에게서 가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신 분이시고, 가치 있는 분이시라면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받은 신자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존귀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그분의 말씀이 세상에 권세를 가지고 존재한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환경과 어떤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하늘의 권세 아래서 보호받고 존귀한 자로 여김받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세와 존귀함을 무시한 채 세상과 똑같이 세상의 것으로 존귀함을 받으려고 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희생, 섬김 이 모든 것이 신자라고 하는 우리에 의해서 조롱을 받는 것이고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라고 하기에는 곤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증인의 권세

오늘 본문에서 증인에게 권세를 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두 증인이 세상의 심판을 외쳤다면 그것은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외친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무시하고 핍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권세 있는 외침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외침에 대한 반응이 기준 되어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11:5)고 말합니다.

'그들'이란 권세를 받아서 예언을 하는 증인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소멸한다는 것은, 실제로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이 나와서 원수를 소멸한다는 것은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가 불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향로에 다른 불을 담아가지고 나왔을 때 불이 나와서 그들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을 하는 것을 여호와의 원수된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고라 자손 등이 모세를 반역했을 때도 역시 불로 인해서 그들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반역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권세를 받은 자를 반역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반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의 권세를 받은 자를 반역하는 것을 곧 여호와를 반역한 원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고 말합니다.

예수님 역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반역한 것은 곧 하나님을 반역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한 그 자체가 곧 여호와의 불로 인해서 심판 받을 원수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이 일을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지막 때 심판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비록 세상이 증인의 외침에 대해서 무시하고 조롱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조롱을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며 그에 대한 결과는 마지막 때 여호와의 불에 의해서 심판 받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11:6)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닫아 비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엘리야를 말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비가 오지 않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했다는 것은 애굽 재앙에서 모세가 물을 피로 변하게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나 모세의 일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세로 인해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비가 안 오게 된 것도 기도의 능력이 아니라 권세의 능력이고, 물이 피로 변한 것 역시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권세의 능력인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권세 아래 있는 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의 존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의 권세 아래 있는 신자의 존귀함에 대해서 깨닫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는 이 권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증인된 신자의 외침을 근거로 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세를 우리들 스스로가 무시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돈의 권세와 세상의 권세가 더 낫지 신자의 권세가 이 땅에서 무슨 힘이 있느냐는 생각은 없습니까? 비록 이 땅에서는 쓸모없이 보여지는 것이 증인된 권세이지만 마지막 때 그 권세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증인의 흔적이 우리의 삶에서 보여지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 기준은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2.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하다고 말합니까?

 

3. 1260일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 기간 동안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본문에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또 그들을 등장시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신자가 증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증인된 신자가 심판을 말하고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신자 스스로 심판과 은혜를 조롱할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7. 자의 가치가 우리 스스로에게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유와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증인들을 세워 말씀하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이며 또 그들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을 불이 나와 삼킬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신자된 우리의 외침에 대해 세상이 무시하고 조롱한다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10. 신자의 권세는 어떤 권세이며 또 그 권세를 우리 스스로 무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2 2024 2월 4일 / 요한계시록 46. (계14:1-5) 어린 양과 짐승의 이름 관리자 2024.02.04 40
711 2024 1월 28일 / 요한계시록 45. (계11:11-18) 짐승의 수 666 관리자 2024.01.28 44
710 2024 1월 21일 / 요한복음 29. (요 6:1-2)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관리자 2024.01.21 10
709 2024 1월 21일 / 요한계시록 44. (계 13:1-10) 세상 속의 신자 관리자 2024.01.21 8
708 2024 1월 14일 / 요한복음 28. (요 5:39-47) 성경과 그리스도 관리자 2024.01.14 8
707 2024 1월 14일 / 요한계시록 43. (계 12:7-17) 땅의 전쟁 관리자 2024.01.14 10
706 2024 1월 7일 / 요한복음 27. (요5:30-38) 증거자의 참된 증거 관리자 2024.01.07 16
705 2024 1월 7일 / 신년감사예배 / (삼하17:15-20 ) 참말과 거짓말 관리자 2024.01.07 7
704 2023 12월 31일 / 요한계시록 42. (계12:1-6) 아이와 여자와 용 관리자 2023.12.31 9
703 2023 12월 24일 / 요한복음 26. (요 5:19-29)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리자 2023.12.24 11
702 2023 12월 24일 / 성탄감사예배 / (마 2:1-12) 베들레헴에 오신 왕 관리자 2023.12.24 9
701 2023 11월 17일 / 요한복음 24. (요 5:9-18) 베데스다에서의 은혜와 율 관리자 2023.12.17 9
700 2023 11월 17일 / 요한계시록 41. (계 11:15-19) 신자에게 확실한 것 관리자 2023.12.17 11
699 2023 12얼 10일 / 요한복음 24. (요 5: 1-9) 베데스다 전설과 신앙 관리자 2023.12.10 9
698 2023 12월 10일 / 요한계시록 40. (계 11:7-13) 두 증인의 승리 관리자 2023.12.10 11
697 2023 12월 3일 / 요한복음 23. (요 4:43-54)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 관리자 2023.12.03 9
» 2023 12월 3일 / 요한계시록 39. (계 11:3-6) 두 증인의 권 관리자 2023.12.03 9
695 2023 11월 26일 / 요한계시록 38. (계 11:1-2)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관리자 2023.11.26 14
694 2023 11월 19일 / 추수감사주일 / (출 23:14-17)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관리자 2023.11.19 13
693 2023 11월 12일 / 요한복음 22. (요 4:39-42) 우리가 친히 듣고 앎이라 관리자 2023.11.12 1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