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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베데스다의 전설과 신앙

본문 / 5: 1- 9

 

1. 신앙과 종교성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뭔가 관심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내가 신앙이 있나 없나?’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면 그러한 물음을 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신자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다면 그가 아무리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두고 생각한다 해도 결국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서 서울로 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서울 가는 열차만 제대로 탔다면 서울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엉뚱한 열차를 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서울로 가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고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명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를 붙들고 따라가면서 생명을 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 정성을 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참되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배우고 또 우리의 신앙이 참된 것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기 전에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시냐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신앙의 기준을 교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기준으로 해서 어느 정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느냐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사실 교회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으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일이면 잊지 않고 교회를 찾아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교회 일에 빠지지 않고 봉사하는 것으로 신앙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과 같은 성전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신앙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신앙 이외의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서 표출되는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는 신앙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책망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 역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까지도 부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믿고 있었던 신앙이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2. 38년 된 병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은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표적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적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이적 자체에 대해서 놀라움과 신기함을 가지기보다는 이적을 통해서 계시되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내용 역시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아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신하의 믿음도 또 신하의 아들이 살았다는 것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순간 아이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는 현실이며 현재임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금 현실과 상관없는 먼 훗날의 내세에 대한 얘기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 역시 다시 산다면, 신자의 현실은 부활 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부활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 안에 있는 자로서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 삶이 진정한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역시 단순히 예수님이 불쌍한 병자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신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5:2)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여러 개의 특정한 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양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서울이 옛날에 한양으로 불리 울 때 사면에 4개의 문을 세워둔 것처럼 예루살렘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양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는 짐승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인 양을 끌고 올 때 양문을 통해서 양을 들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 가까이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양문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양이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양의 희생을 보여주는 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생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산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아니었으면 애굽과 똑같이 장자의 재앙에서 죽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양의 희생은 결국 생명의 은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은 어린양의 희생과 은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란 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란 이름 역시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희생의 제물이 들어오는 은혜의 문 옆에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 사건을 단순히 병고침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이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중풍병자)들이 누워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5:4)고 말합니다. 많은 병자들이 행각에서 기다린 것은 천사가 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베데스다 못에 전해 오는 전설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이 전설을 믿고 많은 병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병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병자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6절 끝에 보면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고 묻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38년 된 병자에게는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으로 인해서 고통받아온 사람입니다. 무슨 병인지는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38년 동안 낫지를 못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단 한 달, 아니 단 하루 동안이라도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빨리 낫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일 년, 이년도 아니고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하나 마나한 질문을 왜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병자가 낫고 싶어하는가를 확인하고자 물으신 것이겠습니까? 네가 낫고 싶으면 나에게 부탁하라는 의도로 질문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질문 의도는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물음에 병자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라고 대답합니다. 병자의 대답 또한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병자로서는 당연히 , 낫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자는 자신의 병이 낫고 싶은가에 대한 가부의 여부는 말하지 않고 그 누구도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아서 자기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의 이 대답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한 개인에 대한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도구로 삼아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병자의 대답 말고 다른 대답을 추정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병자가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 낫고 싶습니다. 나의 병을 고쳐주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병자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신을 못에 넣어 주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 버린다는 원망을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른 길, 즉 베데스다 못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38년 된 병자에게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못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원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행각에 모여 있는 사람은 모두가 병자들입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이들 모두가 38년 된 병자 못지 않게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38년 된 병자를 못에 집어넣어 주기 위해서 자신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세상의 사고방식이 과연 그런 것입니까?

당시 베데스다 못은 지금의 세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완전한 경쟁 체제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물리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합니다. 지금 베데스다 못이 어떤 상황입니까? 물이 움직 후에 먼저 들어가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면 다 낫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낫는다고 합니다. 기회는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행각에는 수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절박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베데스다 못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자들은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자신이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기를 쓸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38년 된 병자가 남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라면 과연 그가 소경의 눈이 되어주고, 절뚝발이의 발이 되어서 그들을 먼저 못에 넣어 주기 위해서 봉사하려고 하겠습니까? 결국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는 자신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에서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합니다. ‘너희들만 없으면 내가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는데라는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보다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는 세상 현실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보다 앞서는 자에 대해서는 원망과 시기를 보이는 것이 세상입니다. 너만 없으면이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항상 타인에게 두는 것입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가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 불행의 원인을 자신을 못에 넣어 주지 않고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두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데스다 못의 현실은 지금 이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모습이 양문 즉 은혜의 삶에 상반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데스다 못의 이야기는 은혜와 상반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과 오늘 우리를 꼬집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38년 된 병자가 불쌍해서 자비를 베풀어 고쳐주신 것이라면, 불쌍한 처지의 사람이 38년 된 병자뿐이겠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기에 베데스다 못에 소망을 걸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불쌍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38년 된 병자만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자비의 공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불쌍히 보시는 것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현실이 아닙니다. 사망의 고통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자비입니다.

 

3. 예수님의 방식

오늘 본문 8절부터 보면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8-9)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방법은 단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병자가 원하는 대로 못에 넣어서 고쳐주실 수는 없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못에 들어간다고 해서 낫는다는 것은 없지만 만약 예수님이 병자를 도와서 못에 넣으심으로 병이 나았다면 과연 그 병자는 자신의 병 나음의 근거를 무엇에 두겠습니까? 예수님이겠습니까? 아니면 베데스다 못이겠습니까? 베데스다 못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나을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못에 넣어주셔서 나았다면 결국 그 병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신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러한 분으로 비춰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을 내가 사는 방책으로 여깁니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이 잘되는 방책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방책을 도와달라고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곧 베데스다 못의 병자가 예수님에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은 단지 병이 나은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 모여 있던 수 많은 병자들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 믿었던 베데스다 못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고 믿었던 사람들 앞에서 말씀으로 38년 된 병자를 나아서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베데스다 못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직장, 좋은 대학, 돈 등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참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책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처럼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문제를 돈을 많이 벌어서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허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에 두고 있다면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방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자라면 자기 나름 대로의 삶의 방책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삶의 방책으로 여기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임을 믿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려고 힘쓰는 그가 바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런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만 계실 뿐 베데스다 못은 없습니다. 교회 역시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믿음으로 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베데스다 못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스스로 베데스다 못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베데스다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해야 상급이 크다고 가르침으로서 교회를 베데스다의 행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부로 여기지 못하고 별개의 베데스다 못을 만들어서 경쟁과 원망의 체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대답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나름대로 삶의 방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경쟁에서 뒤처지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는 것으로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책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데스다 못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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