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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본문 / 8:11-13

 

1. 믿음에 대한 착각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곧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세계가 따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를 이루어줄 능력이 예수님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라는 의미로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인간이 원하는 세상을 이루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흔히 우리들은 그냥 그들의 요구대로 표적을 보여주면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표적은 그것을 본 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혹 그러한 표적을 보고 믿는다는 고백을 한다 해도 그 믿음은 절대로 성경이 요구하는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자인 예수로 바라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표적을 보여줌으로 믿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 표적을 구하는 세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8:12)라는 말을 합니다. 표적을 구한 것은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속성이 곧 세상의 속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표적을 구하던 바리새인들의 속성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이 세상의 속성이며 또 이것이 인간의 부패한 속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만약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기적을 친히 목격한다면 믿음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러한 기적을 보지 못했을 때보다는 더 확고한 믿음이 될 것이라고 자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크고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한다고 해도 그 체험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이점을 사람들이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그 홍해를 건너는 체험 후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기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목이 마르고 배고픈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은 항상 애굽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결국 그 말은 홍해에서의 기적의 체험도 이스라엘의 목마름을 이길 수 없었고, 애굽에서 먹었던 마늘과 부추를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은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꺾을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체험은 순간의 자극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영혼을 배부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도 사람은 항상 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기적이 사라지게 되면 기적으로 말미암은 그 믿음 또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기적을 원하고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생명의 나라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세계를 품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목적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기 세계를 확보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표적을 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위해서는 십자가 외에 다른 표적이 필요치를 않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생명의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로서 온 표적을 구함으로써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예수님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세계에서 쫓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에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는 불필요하고 나아가서는 훼방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한 세대의 특성인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 때문이지 우리가 원하는 세계를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위하여 예수님을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예수를 찾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 나온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루신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꿈꾸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부를 것을 선동하고 또 그것이 곧 믿음이라 가르치며 그러한 믿음은 병을 고치고 복을 받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전혀 비성경적인 말을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외침을 따라 원하는 것을 이뤄주시는 다른 예수에게만 집중할 뿐입니다. 신자가 믿음의 의미를 자신의 생존에 두게 되면 십자가는 보이지 않게 되며,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적만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도 보면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말씀을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각자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을 추종하게 되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은 십자가의 정신과는 반대편에 서 있음에도 자기들 스스로는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십자가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말하며 그들의 신앙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벗어나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가 얼마나 교회 일에 열심이냐를 점검할 것이 아니라 과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을 가지고 서로 분파를 조장하고 자기가 받은 세례로 서로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례란 누구에게서 받았느냐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하든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세워지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행위를 남과 비교하고 우월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의 일을 자신의 업적을 쌓아가고 또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선한 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함으로써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남들보다 못살고 또 교회가 적어도, '나는 너희보다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우리 교회는 작아도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에 못살고, 작은 교회라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을 벗어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이런 분쟁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 합니다. 힘이 있어야 큰소리 칠 수 있고, 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교인 수를 말하고 또 교회가 선교와 구제를 얼마나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목회를 잘하고 있다는 표라고 여기고 또 그것을 내세워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모습이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힘을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그런 세상에 등장한 십자가는 오히려 있는 힘까지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오해하여 십자가까지도 자신의 힘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나는 방언을 한다, 나는 병을 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자랑합니다. 십일조를 했더니 복을 주더라. 주일성수를 했더니 이런 은혜를 주시더라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도리어 차별화해 버리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며, 체험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체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차별을 가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체험도 없이 나온 너하고, 특별한 체험을 하고 나온 나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차별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체험의 목적은 하나, 즉 예수 그리스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체험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같은 것임에도 우리는 그 체험으로 구별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구별화 된 체험은 결국 체험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체험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체험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알았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체험이 있든 없든 우리 모두가 만나는 곳은 그리스도 안 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서 할 일이 과연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오게 되었는가를 자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자랑할 것은 내가 깨닫게 된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죽은 죄인인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는 이 은혜는 모든 신자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체험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게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체험을 자랑삼아서 그런 십자가를 차별화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의 반대편에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랑이 될 만한 모든 것을 꺾어 버립니다. 도저히 자랑을 할 수 없도록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십자가만으로 부족하여 또 다른 무엇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것입니다.

 

3. 신앙과 종교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우리는 아마도 여전히 놀라운 기적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는 일에 있어서 지장이 있고,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기적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고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이 구하는 표적은 아무런 필요도 영향도 없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기적을 구하는 것은 결국 생명이 아닌 다른데 목적과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약 기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기적을 증거 하려고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자신을 증거함으로써 자기 믿음을 더 수준 있는 믿음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체험이라는 것은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것과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동일한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적을 요구하는 종교에서는 이러한 감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있다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개인적인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을 부러워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종교의 세계일뿐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의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이뤄줄 구세주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적을 통해서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십자가만 믿으라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지도 못한 십자가 사건만을 증거로 삼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신앙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인간의 본질인 죄인이라는 자리에서 믿음이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돈이 없고, 몸이 약하고, 사업이 안 된다고 하는 문제들이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피할 수 없고 벗어버릴 수 없는 인간의 실상과 본질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망에 처한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가장 귀한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기적의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의 문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자는 오직 십자가로 족할 뿐 다른 기적이나 체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은 나 같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아니라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그리스도만을 믿는 신자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성령이 활동하고 계신다는 기적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신자 된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의 증거물인데 다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자에게 표적은 오직 주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임을 알게 하고, 생명의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향한 소망의 싹을 틔우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로 족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매일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매일 일하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표적을 믿고 살며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매일의 고백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고백이 우리의 믿음이 되며, 찬양이 되며, 감사가 되는 복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이유와 예수님이 그 요구를 거절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세대라고 하신 이유와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3.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표적을 구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악한 세대의 특성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고린도교회의 분쟁 원인과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6. 신자가 행하는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이며 또 목적을 모를 때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까지도 차별화 하려는 자들의 모습과 그 내용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8. 하나님이 허락하신 체험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 목적을 모를 때 증상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9.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체험은 무엇입니까?

10. 종교적인 자들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며 또 신앙의 삶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 어야 한다고 합니까?

11.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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