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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맹인 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본문 /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8:22-26)

    

 

1. 내 이야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시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든 사건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의 단순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치유 이적으로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단순한 치유 이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병자든 그 병자를 치료하는 사건 하나하나는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자신을 그 현장으로 이끌어 가서 우리를 그 당사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병을 치료하는 사건은 그와 같이 병들지 않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주 앞에서 치료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육신의 병든 자만 데려다가 치료 받게 하려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성경을 보고 있는 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9-18)고 합니다. 바울사도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가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잡이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줄 알고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핍박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울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구약 성경 전체를 동원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말씀만 보아도 구약의 6곳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약의 이러한 말씀들이 자기를 향한 말씀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이러한 죄인이 자신임을 그라고 모든 인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8:44-45)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17장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11)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이 이렇게 거짓되고 부패하다는 것을 인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아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자기들의 죄가 어떠함을 알아간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잘 지킨 자는 의롭다고 여기고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율법을 받지도 못한 자들은 정죄하였습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너희 아버지가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사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완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마귀가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는 자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마귀의 종인 줄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바로 마음이 부패한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충만하여 말씀을 대해야지만 성경의 말씀이 내 이야기로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2. 믿음 없음

오늘 본문의 내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은 단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던 제자들이 곧 맹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제자들이 길을 떠났을 때 떡 가져오기를 잊어서 배에 떡이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인해 근심한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 같은 마음을 아시고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떡이 없어서 그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음이 둔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맹인, 귀머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에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등장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맹인이 곧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는 이적을 목격 했습니다. 또한 그 전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길을 떠나면서 떡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의논들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한 의논이 무엇이겠습니까? 깜박 잊고 떡을 가져오지 않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모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떡이 없는 문제가 예수님으로 인해 해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이미도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적어도 떡의 문제로는 고민할 것도 또 염려할 것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라면 떡이 없어 주리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그 상황 또한 예수님의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떡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떡이 없어 주린다면 그것은 그 주림을 통해서 뭔가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떡이 없음으로 인해 의논을 했다는 것은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한 맹인과 같은 그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결과가 된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맹인은 제자들이고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항상 떡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염려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수중에 떡 하나밖에 없다. 앞으로 뭘 먹고 사나?’는 식으로 내 손에 쥐어진 것이 나를 살린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떡은 우리의 육신을 지탱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떡은 먹으면 잠시 후 소화되어서 배설물로 배출 되고 또 다시 배고프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후에 유대인들이 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1)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6:49)하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35.~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6:35-36)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대인들과 똑같이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의 배부름과 만족을 위해 더 많은 떡을 손에 갖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더 많은 떡을 갖고 있는가?’로 경쟁하고 강자와 약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이런 세상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즉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이 어떠한 길로 가고 있는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떡의 문제로 염려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지 않는 것이고,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맹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맹인은 곧 우리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치료하심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일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입니다. 왜 굳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맹인을 고치셨을까요? 맹인을 고치시는 이적을 마을 사람들에게 감추고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많은 무리들 앞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굳이 맹인에게는 그리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맹인을 사회적인 통념과 시선으로부터 분리시킴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세상만의 통념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도 사회적인 통념이 작용을 합니다. 즉 소유의 여부, 학식의 여부, 인격과 도덕 등등 수많은 잣대를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맹인이라는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이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았겠는가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도 맹인이라는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살기는 매우 힘든 곳입니다.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이 되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해도 직장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맹인이 겪어야 했던 고초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한 맹인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심으로써 맹인과 세상을 구별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역할도 그러합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떡으로 인해 염려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시고 대신 말씀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눈을 뜨게 하시고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8:24)라고 답합니다. 이 말은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까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동동번역)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자 나아서 밝히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특이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맹인의 눈을 치료하셨을까요? 이것을 두고 점진적인 치료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점진적 치료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맹인을 통해서 신자가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무엇이 보입니까? 우리의 눈에도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맹인이 보게 된 것처럼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부자로 보고 가난한 자로 봅니다. 이것을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맹인 같은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그러한 시각에는 사람이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별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나무 같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는 진심으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돈보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 뜨인 사람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곳이 세상이기 때문에 돈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것은 항상 큰 근심거리와 염려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밖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진심으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눈이 뜨인 자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멸망의 장소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면 비참한 생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보게 됩니다. 맹인의 눈에 모든 사람이 나무 같이 보인 것처럼, 죄인이라는 하나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고, 그 믿음이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존귀한 분으로 굳건히 자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믿음만으로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도 처할 줄 아는 사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손에 쥐어진 것을 보면서 절망을 하기도 하고,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절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고,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나를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 된 사람이라면 예수님만이 희망이 되는 삶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에게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세상으로 끌어 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에 포부에 동참시키려고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세계를 위한 예수님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눈을 뜬 신자의 시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조력자쯤으로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신자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큰 사랑으로 다가와서 예수님을 따라 가고자 할 뿐입니다. 손에 떡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는 능력의 세계를 알고 그 세계를 살고 싶은 소망으로 예수님을 찾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밖에 서 있는 것이고,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나가고,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하시기를 바라며, 그 은혜와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든 자를 고치는 사건을 보는 우리의 시각과 또 그렇게 보아선 안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구약의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시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우리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본문의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은 지난 주 말씀과 어떻게 연결이 된다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6. 예수님을 믿는 신자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7. 오늘 본문의 맹인을 예수님께서 마을 밖으로 데려 나가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8. 오늘 본문의 맹인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말씀에 이끌려 눈이 뜨인 자로 살아가는 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인다고 합니까?

10.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어떤 예수를 소개하고 어떤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고 합니까?

11.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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