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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계속되는 화

본문 / 9:12

 

1. 재림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 보면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으로 마칩니다. 이렇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말씀으로 성경이 마쳐지고 있다는 것은 주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을 이 주의 약속 앞에 세워서 한번 곰곰이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나 자신 속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믿음에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열망이 과연 어느 정도라고 생각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곧 절망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다시 오실 약속을 주신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분입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나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자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난자라는 의미가 포함된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작정 재림을 시간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뿐인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한부 종말론자들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결국 엉터리로 드러났지만 당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있는 재산도 다 처분해서 교회에 바치고, 직장도 버리고, 가정도 버린 채 교회에 모여서 날마다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면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천국으로 끌려 올라가는 휴거를 기다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보다는 내가 천국 가는 것에 더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심으로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는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심판을 제외하거나 무시하면서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을 말한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있어서 심판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다리는 심판자는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겠습니까? 율법이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선하고 악한 행위이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고난이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라는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말하면 단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판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의의 나라를 완성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의를 세우시기 위해서 죄를 없애는 것이 심판입니다. 따라서 심판은 곧 세우심이지 파멸이 아닌 것입니다. 의의 승리가 심판이며 재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가 기대를 거는 것은 그의 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희망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참아지고 견뎌지는 자가 곧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심판과 연관이 있고 그 심판 또한 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라면 그리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 신자라면 세상이 좋은 환경의 나라로 변할 것에 대한 기대는 가지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한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의만 남기시고 나머지는 없애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을 자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 남을 자를 구별하시고 있습니다.

 

2. 세상에서의 삶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9:12)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화가 지나갔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화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인생에서 미치는 화는 한번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이젠 별문제 없이 편안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첫째 화가 지나가고 화 둘이 이른다는 것은, 앞으로 화 둘만 잘 견디고 나면 화는 끝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되어지는 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갈과 황충은 늘 있습니다. 전갈과 황충은 언제나 권세를 가지고 땅에서 신자를 괴롭힙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형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누가 내 백성인가를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에게 괴로움이 없다면, 원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괴로움을 당할 때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즉 괴로움이 도구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광야가 살기 좋은 땅이었다면 그래서 광야가 괴로움이 없는 환경이었다면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항상 살기 좋은 환경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 땅을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버리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누가 거짓된 신자고 또 누가 믿음으로 사는 참된 신자인지가 분간이 안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항상 구분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25:32-33)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마지막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로 구분되는 것은 마지막 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별은 이미 이 세상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에게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소의 삶에서 이미 분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을 때는 내 마음대로 살고 죽을 때쯤 해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별은 죽을 때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삶속에서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37.~~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라고 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세상에 있게 하심으로서 누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어서 지극히 작은 자가 사라진다면 결국 양과 염소가 분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신자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잘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첫째 화가 지나갔으나 화 둘이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속마음에는 '내가 이렇게 죄 안 짓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면 하나님도 나를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겠지'라는 생각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평소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산다고 할지라도 힘들고 괴로운 문제가 발생하면 당장 '내가 잘못한 게 뭔가?'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복음으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썼고, 예수님만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불만과 원망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에게 닥친 화에 대해서 이해를 못 할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화가 미친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화가 미치는 것은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이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인간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화를 당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욥이 고통에 빠졌을 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 욥을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단에게 욥의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단과의 대화에서 사단에게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욥 개인의 선악이나 행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단지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서 욥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생각하는 인간의 믿음의 수준은 까닭 없이는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은 사단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구 말이 맞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욥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욥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계시록 91절에 보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땅에 떨어집니다. 땅에 떨어진 별은 사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단이 무저갱의 권세를 받아서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왜 하나님은 사단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허락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허락을 하신 것 때문에 사단이 무저갱의 문을 열고 황충을 땅에 올라오게 합니다. 그리고 땅의 전갈과 같은 권세를 가지고 땅을 괴롭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까? 사단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국 무저갱에 영원히 갇힐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사단을 무저갱을 가둬버리면 될 일인데 왜 무저갱을 열 수 있는 권세까지 허락을 해서 땅을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심판은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기 위해서도 아니고 세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목적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세상에 대한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라면 일을 이토록 복잡하게 하신다거나 미루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의의 나라의 백성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사단을 땅에 떨어뜨리시고 무저갱의 열쇠를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분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는 심판 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순간순간 결정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화를 당했을 때 이것만 잘 견디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믿음

우리 인생은 고통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한번 고통을 잘 견뎠다고 해서 나머지 인생은 편안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고생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계속 되어진 고통의 연속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고생이 끝났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로 인해서 고생을 하게 되는 삶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에 전갈과 황충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세상에 함께 하는 것이 황충이며 괴로움을 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편안하고 축복된 삶이란 단지 망상이며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화가 미치고 고생이 주어지는 것은 괜한 일도 아니고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주어지는 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누가 내 백성인가?'를 분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욥의 믿음을 자랑하자 사단은 '욥이 까닭 없이 믿겠습니까?'라고 반발을 합니다. 우리는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어떤 이유가 있어서 믿고 있습니까? 사단은 욥이 많은 소유를 받았고 자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사단의 생각입니다. 까닭 없이 믿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사단이 말하는 수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수준입니까? 만약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장담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우리 의지와 우리 결단으로 믿고 있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고 또 무엇으로 분별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된 믿음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믿음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화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까닭이 있어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화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분별이 화를 견디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화를 견디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욥이 자신에게 주어진 화를 견딤으로서 믿음이 드러났습니까? 도리어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화가 무슨 까닭으로 주어진 것인지 무척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만약 욥이 첫 번째 화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면, 두 번째 화에 대해서 쉽게 답을 내렸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원망했더니 하나님이 내 몸을 쳐서 징계하시는구나'라는 답을 쉽게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재산이 다 사라지고, 자식도 모두 죽어버린 엄청 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화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친구들이 뭔가 죄지은 것이 있으니까 이러한 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욥은 스스로 자신하기를 나는 이러한 화를 당할만한 죄를 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욥의 입장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내 자신이 화를 당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화든 복이든 그것은 우리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지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진다면 그는 분명 몰랐던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화든 복이든 나와 연관됨이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복이든 화든 나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주어진 화에 대해서 무척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믿음을 드러내시고 의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주어진 화라면 우리의 고통이 애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자신과 연관 지어 생각하려고 했던 무지함에 대해서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믿음이 세상에 증거 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얼마든지 고통에 들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화를 애매하게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예수님의 입장에서라면 애매한 고난입니다.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신자란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고통을 통해서, 화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우리의 삶을 통해서 확인하십시오.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의의 나라가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를 새롭게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부활 생명을 가진 신자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다시 오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첫째 화가 지나가고 화 둘이 이른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전갈과 황충에게 권세를 주어 세상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5.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의 분별은 언제 이루어진다고 하며 또 그 분별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화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욥의 고난을 통해 알 수 있는 인간이 만든 믿음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은 어떻게 분별되어 집니까?

 

8.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끊임없는 화로 인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 하십니까?

 

10. 오늘 말씀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무지는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신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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