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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본문 / 9:13-21

 

1. 하나님의 일하심

믿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확인 되어집니다. 믿음과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삶은 신자의 삶이라 할 수 없으며, 삶이 없는 믿음 또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은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을 담아서 보여주고 나타내는 그릇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할 때, 단지 '내가 내 마음을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 같고 사랑하는 것 같다'는 스스로의 판단 만을 가지고 '나는 믿음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삶을 떼어놓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가 믿는 자일 것이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자일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있고, 주님의 고난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 편에서 산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만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산다고 해서 그것으로 주님만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삶을 통해서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있다면 그 충만함과 다스림을 어떻게 이웃에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과 삶이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이 곧 말씀이고, 말씀이 곧 삶이었습니다. 신자 역시 믿음과 삶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삶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어떤 모습을 통해서 믿음이 확인되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의 인생에서는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생에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발생한다는 것이 싫고,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바람은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와 고난을 걷어가 주시는 것에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문제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제가 있음으로 인해서 믿음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생에 문제가 없다면 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그래서 편안한 삶이 계속되어 진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마 감사하는 마음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에서의 감사는 믿음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이나 편안함 삶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이란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누가 믿음으로 사는 자인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에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달라고 했을 때 바로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고역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힘들어지자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힘들어지고 어려워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원망을 한 것입니다.

또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에 도착을 했을 때도 뒤에서 애굽 군대가 추격을 해오자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광야에서도 마실 물이 없을 때 원망을 했고, 먹을 것이 없어도 원망을 했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이 그리워도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기고 힘들어질 때마다 그 모든 원인을 모세에게 돌리고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편안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을 그들의 불신앙이 계속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고통과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보심으로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은 사단에게 권세를 주셔서 세상을 악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어둠으로 가득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고 어둠으로 가득해야 그 속에서 의와 빛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에서 믿음이 없는 자, 심판받을 자들을 확실히 구분하시기 위해서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끊임없이 문제가 계속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신자가 함께 화를 겪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자라면 자신에게 일어난 화가 곧 애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세상

오늘 본문에 보면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9:13-15)고 말합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때 요한은 한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금 단 네 뿔에서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강입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그 강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네 천사가 결박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다 결박당한 악한 천사임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에덴동산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단이 뱀을 통해서 하와를 미혹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박당했다가 놓여난 천사들은 모두 악한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삼 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이러한 재앙을 허락하시고 오직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과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화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고난을 생각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고 말합니다. 씨름이라는 것은 맞붙어서 힘을 겨루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힘을 겨루어야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곳에 힘을 소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대한 씨름으로 살아갑니까? , 좋은 집, 좋은 직장, 혹시 이러한 것으로 씨름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더 돈이 많은지 누가 더 좋은 집에 사는지, 아니면 누가 더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봤는지, 이런 것에 대한 경쟁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혈과 육에 대한 씨름으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쓸데없이 힘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씨름을 하고, 어떤 싸움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혈과 육의 씨름을 하고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적거나, 남들보다 뒤쳐진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하게 합니다. 자존심의 싸움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러한 우리들의 마음과 씨름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9:16)고 합니다. 여기 마병대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17절에서 보면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9:17)고 합니다. 이것은 아무 무섭고 강한 모습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강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고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 아래 굴복하고 살아가는 속에서 누가 과연 굴복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믿음이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주어진 자가 굴복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능히 사단의 권세를 이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인 믿음이 주어진 신자는 믿음의 힘에 의해서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어둠의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믿음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둠에 의해서 찢기고 상처받고 죽임 받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의해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복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 역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믿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늘의 악의 영들을 모릅니다. 하늘에 전쟁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싸움은 오직 혈과 육에 대한 것이지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육에 대해서 손상을 입게 되면 참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강퍅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부터 보면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9:20-21)고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화나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욱 더 강퍅해질 뿐입니다. 세상은 오직 혈과 육에 대한 씨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화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내 한 몸 보호할 수 있고, 내 가족 형제들을 보호할 수 있느냐는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족과 부모 형제를 세상의 재난과 화로부터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절실히 느끼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날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돈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낍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돈이 있어야 살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자존심도 세울 수가 있고, 돈이 있어야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허락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속되는 전갈과 황충으로 세상을 괴롭게 함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절실함을 느끼도록 합니다. 그리고 돈에 굴복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돈이 우상 된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21절에 보면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말합니다. 악한 일을 해놓고도 회개치 않더라는 것은 그 마음속에 이미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했을 때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의도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해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돈 없고, 무식하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잘 안되는 자신을 생각할 때 세상이 미워지게 되고 원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강퍅함인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회개가 없습니다. 돈만 내 수중에 들어오면 되고 또 돈만 있으면 그것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을 선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기에 돈을 버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서도 회개치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세상은 돈이 다스리는 땅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부럽지 주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부럽지가 않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몇억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더 부러워하는 것이 세상이며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 가지고 세상을 종횡무진하면서 여기저기서 말씀만 전하고 기쁨으로 살았던 바울을 부러워하십니까? 과연 바울의 삶에 대해서 부러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 부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하고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그 명예가 부러웠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돈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살았는지, 혈과 육의 씨름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린 무엇에 대해 씨름을 하며 살았는지, 회개치 않고 강퍅함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회개하는 삶이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이 악해서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죄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내가 다 아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전파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회개치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 속에서의 자신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돈으로 살아가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도록 방치하셨습니까? 악한 천사들을 놓아주고, 사단에게 권세를 허용한 것으로 인해서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것을 허용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돈이 힘이고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누가 과연 돈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치면서 회개하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돈 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치면서 회개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찾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도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돈보다도 인간 도리가 중요하고, 돈보다도 인간다움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만, 돈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별 가치 없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화를 당할수록 돈에 대해서 절실해 집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는 계속되는 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화를 당할수록 돈이 없는 자신을 한탄하게 되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계속되지 않으면 돈에 대한 절실함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돈에 대해서 초월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 역시 돈을 의지하는 인간이고, 돈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바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자신을 발견함으로서 그동안 평안함 속에서 마치 자신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만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굴복한다는 것은 돈에 대한 절실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믿음 앞에서 사단은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돈에 대한 절실함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인간을 회개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삶에 회개가 있습니까?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돈에 대한 절실함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본질이라는 것이 돈에 대한 절실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돈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도록, 화가 끊이지 않도록 방치 하시고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고 우리의 인생에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신자로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돈 있는 자로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과 삶은 어떤 관계라고 말씀합니까?

 

2. 우리 인생에서 문제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하나님께서 결박당한 악한 천사를 놓아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씨름과 사탄이 우릴 부추겨 시키는 씨름은 어떻게 다릅니까?

   

5. 사단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자는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6. 사단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느끼며 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치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에서 왜 하나님은 돈으로 살아가고 또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도록 방치하셨다고 합니까?

 

  9. 신자가 세상에서 만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알게 되고 회개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돈에 굴복하는 사단의 승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믿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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