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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양식

본문 / 4:27-38

 

1. 여인의 변화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의 감추어진 죄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심 산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이 있는데 어디서 내 죄를 위해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이것이 자기 죄를 알게 된 여인이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죄의 해결책은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구약의 율법적인 수준입니다. 내 쪽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함으로 인해서 죄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 수가 있다고 믿는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어느 산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러한 예배를 드리려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와야 가능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던 여인이 점차 점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씩 여인의 마음을 가리고 있던 것이 벗겨짐으로서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여인으로 바뀌어지고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부터 보면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4:28-30)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여인을 찾아오셨을 때의 반응과 전혀 다른 바뀌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여인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 봤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또 조상이 예배했던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찾는 교회가 있고,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찬송, 헌금, 구제 등등의 많은 종교적인 행위가 있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이 날 찾아오셔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이 필요하다면 여인이 구하는 생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시자 여인은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그 생수를 달라고 합니다.

이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무지함으로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하면 , 제발 돈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복을 좀 주십시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오신 분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진다는 것에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죄인된 인간은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영원히 의와 멀어진 채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서 용서되는 죄를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디에서 예배할까요?’, 즉 인간의 종교 행위를 내세워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자리에 교회, 예배, 기도, 이런 것들이 자리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자기의 모든 행위를 버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나의 구세주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저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물론 후자일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믿음은 자신의 행위를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들 속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 이 모두가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모두 스스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는 이상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필요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이 곧 메시아이고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양식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전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이유가 여인으로 하여금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믿음을 자신으로부터 출발시킵니다. 이것이 믿음의 잘못된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믿음은 결국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지키고 유지하고 자라게 하려는 시도만을 이끌어 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여인이 예수가 메시아이며 그리스도라는 지혜가 있게 된 것이 여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여인은 찾아오신 예수님을 밀쳐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떠나지 않으시고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여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여인 스스로 믿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한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이 여인을 찾아오셔서 수고하시고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절부터 보면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3-4)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하는 것이 가까운 길이라고 해도 일부러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겠다는 것이 갈릴리로 가는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했다는 이상한 구원론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이 분명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말씀은 길의 멀고 가까운 문제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서 믿음이 있게 되었다면, 오늘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고 자신의 죄의 본질에서 예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역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죄의 자리에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 역시 주님이 찾아오셔서 수고하시고 일하신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연히 어쩌다 보니 교회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든가, 친구가 나를 전도해서 교회를 다녔다는 식으로 예수님의 수고와 열심을 빼버린 채 믿음을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지혜를 갖게 된 것이 과연 쉬운 일이며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것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깨우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존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인도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단번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드러내었으며 결국 자신의 죄가 드러난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안 후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을 가지고 오늘날 성도도 물동이를 버려야 한다는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물동이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를 때의 여인과 알고 난 후의 여인의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여인에게 승리하신 결과가 물동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동이를 버린 것은 예수님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동이가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과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해와서 예수님에게 잡수실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누군가가 먹을 것을 갖다 드린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하게 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양식은 오직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떡 외에는 없었습니다. 즉 떡 말고 다른 양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양식을 갖다 드린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양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 역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양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이 곧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일은 무엇인 것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8-40)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뜻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에게는 이 일이 곧 양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시고 그를 만나 말씀하시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신 그 모든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나에게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을 만나시고 그를 믿게 하신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쌀과 보리 그리고 밀과 같은 것들을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세상은 그러한 것을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식과 음식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양식을 가지고 만든 것이 음식입니까? 이것 역시 요리라는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양식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양식은 한마디로 말해서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 이것을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고픔이 과연 먹을 것에만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만으로는 배부름을 얻지 못합니다. 먹을 것으로 육신은 배부를지언정 그 욕망은 언제나 배고픈 상태에 머무를 뿐입니다. 돈에 배고프고, 출세에 배고프고, 좋은 집에 배고파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돈이며 출세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세상의 좋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모두 이 양식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한 다른 양식을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먹을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다른 양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먹을 것이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다만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욕심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다른 양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배부름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 역시 이러한 삶이 되어지는 것이 마땅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된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물을 길러 올 필요가 없게 하는 생수로 이해한 수준에서 벗어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물동이를 버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양식

이처럼 양식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추수의 개념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35절부터 보면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4:35-36)고 말씀합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양식에 대한 추수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추수는 바로 지금입니다. 세상의 양식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추수는 하나님이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이 곧 예수님의 추수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였던 것입니다.

추수는 알곡은 거두고 쭉정이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추수되었다는 것은 알곡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자에게 복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알곡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 신자로서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추수하신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고, 예수님의 양식이 여인에게도 양식이 되어진 것입니다.

신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알곡으로 추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수고하시고 열심으로 일하신 열매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알곡으로 추수된 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추수에 참여한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신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과 희생 그리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이며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이것으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양식입니까? 육신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먹을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욕심의 배부름을 위해서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양식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양식 삼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이 바뀐 것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수고하심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연이 믿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고로 믿는 자 되었음을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인이 물동이를 버린 것에서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이었는가를 깊이 묵상하시고 신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여러분의 마음에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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