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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2012년

본문 /  눅12:13-21


1. 본문 내용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은 읽을 때마다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인식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비록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삶을 지적하고 우리의 내면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결코 우리가 죽어서 갈 천국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관념의 세계를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음서의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내용을 논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때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삶은 빼 놓고 단지 본문의 내용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본문의 말씀은 실제로 그것을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본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는 메시지를 단지 ‘열심히 헌금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얼핏 보기에는 별개인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첫째는 그의 형과 유업의 문제로 예수님의 판결을 구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고, 둘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하는 것은 이 두 사건이 하나의 소절로 구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소절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첫 번째 사건에서 자기 형으로 하여금 유업을 나눠주게 해달라고 구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사건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서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첫 번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실화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 실화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말씀하시려는 비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목적은 비유의 주인공인 어리석은 부자의 구원이 아니라, 실화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하는 자를 향한 깨우침에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부모의 유업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형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유업을 한 푼도 못 받고 억울해하는 동생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비유 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에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이라면 오늘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부를 쌓지 못한 자들은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틀림없이 그 형에게서 유업을 나누게 해 달라는 동생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그 유업을 혼자 차지한 형이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그 유업을 어떻게 좀 나누어 보겠다고 따라다니는 동생이 ‘어리석은 부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출발선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부유한 자들에게는 부담스러움으로 또 헌금을 많이 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의적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분명히 유업을 차지하고 쌓을 곳이 없어 아우성치고 있는 모습은 형의 모습인데 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부자인 형이 아닌 오히려 빈털터리인 동생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과 우리의 삶의 간격이고 또한 믿음이 관념에만 머물러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소유했느냐 또는 소유하지 못 하였느냐로 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 탐심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탐심’에 대하여 알아야만 합니다. 탐심이 있으면 어리석은 부자 즉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며, 만일 탐심이 없다면 그 삶이 곧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내게 있는 재물을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에는 자기 형으로 하여금 부모의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는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부탁을 하고 있는 그 동생이 이러한 탐심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 형이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이 말은 그 형이 탐심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언급에서 제외되었다는 뜻), 재물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동생이 예수님의 시각에는 어리석은 부자로 보이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어리석은 부자가 되게 하는 탐심이란 어떤 것입니까? 탐심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친 욕심으로 무엇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이 동생은 자신에게 유산을 나눠주지 않은 형보다 더 많은 탐심을 가진 자로 보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당한 몫으로 돌아와야 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 그것이 과연 매우 욕심이 많은 탐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탐심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오넥시아’( πλεονεξία )라는 단어로 ‘더 많은’ 이란 뜻을 가진 ‘플레오’(πλείων)‘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코’(έχω)의 합성어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원천적인 개념은 ‘자기 소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상태에서 더 가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탐심’인 것입니다. 결국 탐심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가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 상태보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적이고도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탐심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에서 자가용을 샀으니까 우리도 자가용을 사야 되겠다는 생각이 탐심이 아니라, 자가용 정도는 그래도 갖추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그 생각이 바로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만 달러인 시대가 되어서 모든 집에 자가용 한대는 다 사고 가지고 있으니 그 정도 생활수준은 당연한 것이고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생각이지 예수님의 생각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가 보는 탐심은 현재의 소득과 소비가 삼천이냐 오천이냐에 있지 않고, 지금 삼천으로 살면서 사천과 오천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근면’이니 ‘경제자립’이니 아무리 그럴듯한 이름으로 치장해 놓는다고 해서 탐심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씀들이 우리로 하여금 근면하고 또 성실하게 살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하는 이유와 근거는 지금보다 나은 집을 얻거나, 좋은 차를 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나의 전부가 되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며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타나는 모습은 같을지라도 그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내 마음의 이유와 근거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고, 그 순종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탐심이 무엇입니까? 더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언제나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늘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에는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마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지 않으시고 계속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동차나 컴퓨터 또는 전화, 전기, 시계, 피아노, 다이아몬드 등이 정말로 꼭 필요한 것입니까? 사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우리가 사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곧 탐심이고 또 그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는 마음이 유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탐심이 우상숭배”(골3:5)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탐심이 만들어 놓은 온갖 물질문명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탐심의 산물인 문명은 하나님과 어울려 살도록 되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온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의 사귐만이 인간들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찾고 교회에 다닌다고만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유업을 나눠주지 않은 형의 동생-처럼 예수 앞에 가서 자기 형의 재산이나 나누어 달라고 부탁(기도)을 하는 신앙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사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의 관계성을 놓치기 싫어하는 부탁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3. 어리석은 부자와 나의 것

이러한 상황을 두 눈으로 보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돈 벌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먹여 살린 구두쇠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관심사에 대하여는 부요하면서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묻는 물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왜 찾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자기의 관심사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곧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자인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사업에 무슨 도움을 받고자 또는 병을 고쳐야겠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예수의 인도하심이 필요해서, 나아가 천국을 좀 가야겠는데 역시 예수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나아온 것이라면 우리는 오늘 본문이 지적하는 ‘어리석은 부자’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인 것입니다. 것입니다. 실제로 재물을 많이 가져서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과 원하심이 관여하실 여지가 없어서 부자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표현을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하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고, 하나님의 원하심과 뜻을 알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재물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부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주님의 원하심을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할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탐심 때문에 그것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어 끌려가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물건 나누는 일에도 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20절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6:20)는 것입니다.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오늘밤에 내 영혼을 하나님이 찾으시면 내가 예비한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이 되는 것입니까?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식들의 것이 되인지?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나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내가 나의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아내의 인생, 자식들의 인생을 살았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은 어디 있으며, ‘나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살기에 그런 자들을 오늘 본문은 바로 ‘어리석은 부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이 자기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자기 아내나 자식들의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그 물건을 나누실 때에 하나도 자기 것으로 챙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살며 오고가는 수많은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누리며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할 것들이지 결코 ‘나의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영원히 나의 것 인양 매여 있는 우리가 바로 오늘 본문의 동생이요 곧 어리석은 부자인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누가복음 16장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9-13) 여기에 참된 것과 너희의 것, 즉 우리의 것이 나옵니다.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한 자가 후에 영원한 처소에 들어 갈 때 참되고, 진정한 나의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주를 찾는 이유는 분명한 것입니다. 주가 맡기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주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냐를 묻기 위해 찾는 것이 그렇게 주님의 관심사를 위해 주를 찾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께 대하여 주요한 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을 나의 관심사에만 관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치 못하고, 나에 대하여만 부요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로 말미암아 2012년 한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새해가 시작하는 첫날에 우리 모두가 한해를 허락하신 주님 앞에 ‘왜 2012년 새해를 주셨는가?’ 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년까지는 내 관심사에만 관심했던 나의 삶이었다면 새해에는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되시어서 올해의 마지막 시간에는 올해를 시작하는 지금 이 시간보다는 더욱 더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이야기는 어떻게 구분하여 보아야만 합니까?

2. 탐심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와 성경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 우선 점검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4. 우리에게서 탐심이 발동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자기에 대하여는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치 못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이 땅의 것이 나의 것이 아닌 까닭과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나의 것’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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