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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연보

본문 / 고전16: 1-12

 

1. 복음의 전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생이나 부활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이나 부활은 현재의 나의 모습이 더 완벽하게 되어서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구 선수들도 투수가 침체에 빠져 있다가 다시 성적이 잘 나오면 강속구가 부활했다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성경을 보다 보니 성경의 부활도 세상의 방식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예전엔 한때 스타라고 했던 연예인을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 지지하는 연예인이 다시 예전의 그 인기로 부활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런 것을 부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만 합니다. 죽어야만 하고, 묻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몸이기 때문이고, 아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담의 몸은 죽을 몸이며, 썩을 몸이며, 약한 몸입니다. 혈과 육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인데 그것을 이기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의와 생명의 법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안에서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죽어가는 몸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몸을 죄와 사망이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자기 소유인 우리들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나 약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예배 때 들었던 하늘의 소망에 대한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아이고 추워라! 누가 온풍기 껐나. 결혼식에 가야 되는데, 망년회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하면서 다시 땅의 생각으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서 갑자기 땅으로 추락한 느낌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느낌이라도 들면 괜찮은데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지금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아이고 맞네’ 하고는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활의 영광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예배당 나가며 까맣게 잊어버리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한 정신을 가지고 아마도 이 한 주간도 열심히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제 16장에서 마무리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16:1) 연보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헛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헛되지 아니하는 주의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로 마치면 될 텐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이야기 자체가 갑자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찬바람 쏘이고 나니 현실에 눈떠지는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그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곧 복음인데 무슨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좋으면 복음도 좋아야만 합니다. 결국 그 말은 예수님이 좋다면 그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옳은 길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또 순종하여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옳은 길이라는 것이 좁은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싫은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좋다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한 예수님이기에 좋은 것이고, 복음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기에 싫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그 예수님은 그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 오셨지만 당신의 뜻대로 행하거나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셨기에 그 길을 걸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죽이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언제나 전제가 되어야지만 복음이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살려고 퍼덕거리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의 사심과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이 싫은데도 왜 아직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입니까? 혹시 헌금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그나마 지금까지 참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 은혜 = 연보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연보를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간 다음에야 비로소 헌금하느라고 서두르지 말고 그것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나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연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자신들이 개로 여기는 이방인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 연보를 주고받음으로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란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니라 빚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들이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남이 아니요 지금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시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고전16:2-3)고 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매 주 첫날, 즉 우리식으로 하면 주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지만 연보를 드리는 시기가 ‘주일’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연보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형편, 즉 자신의 수입 정도에 따라서 연보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연보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 부류의 계층에만 제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모든 사람이 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기에 그곳으로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내는 연보를 3절에서는 ‘은혜’라고 합니다. 돈을 보내는 것을 가지고 은혜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연보자체가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고전16:4-11)고 합니다. 그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한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갈 때에 바울사도가 편지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는 것이 합당하면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지금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에베소에 전도의 문에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에 열려있다는 것은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대적이 있지만 주께서 아직도 그 성에 자기 백성이 있기에 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고린도에 올 것인데 그러면 겨울을 함께 지나고 또 다른 곳에 전도하려 갈 여비를 마련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가 죽을지언정 자기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또 자기가 가는 것에 대하여도 연보로 도우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 일이 바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일이기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이르면 그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에 조심하여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연보가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말하는 연보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은혜로 연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연보의 삶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리가 점검하고 가야 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5-20) 바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연보를 안 하는 것이 마치 무슨 의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즘 교회가 워낙 돈을 이야기하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하다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라고 한 것이지 연보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른 복음을 들었다는 자들이 연보를 안 하고 있는 자신을 말씀을 가지고 합리화 시켜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한 우리의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면 아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8장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15)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제발 이런 은혜는 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까? 우리의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말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 즉 연보에도 풍성하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연보가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고 합니다. 여기서 부요함이란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은혜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환난과 극심한 가난은 상대적인 빈곤감이 아니라 절대적인 빈곤입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형제 섬기는 연보에 대하여는 힘에 지나치도록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도 계속하여 은혜가 주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하늘 보좌에서 낮고 낮은 말 구유에 오심으로 주어졌습니다. 짐승과 같이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섬기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요하신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연보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부요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도 그 부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연보할 때마다 이 주님의 연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연보는 자랑이 아니라 연보하고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연보는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어떤 연보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된 연보는 은혜로만 됩니다. 은혜로 연보하게 되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며, 오직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충만하여 우리의 연보가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어 은혜가 되어지는 아름다운 연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세상에서 말하는 부활과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2. 예수님은 좋아하면서 십자가는 싫어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3. 연보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왜 굉장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까?

4. 바울은 연보를 어떻게 하라고 하며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연보에 대해 자기 합리화는 무엇이며, 연보가 아깝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6. 마게도냐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바울이 연보를 은혜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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