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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본문 / 고후 3:12-18

 

1. 직분의 영광

오늘 본문은 옛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의 우월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미 옛 언약에 대해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장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4-17)고 합니다. 옛 언약인 율법은 고발하고 정죄하며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 언약의 직분을 모세가 맡았는데 그 직분도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죽이는 옛 언약의 직분도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면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인 영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증거 하는 자들이 바로 새 언약의 일꾼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 가운데 예수님이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고 말씀하신 것처럼 새 언약의 일꾼은 옛 언약의 영광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옛 언약의 영광인 모세의 영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4장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34:29-35) 이 증거 판은 두 번째 돌 판입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이미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 때에 모세가 깨어버렸습니다. 만약 깨어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진멸당하여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 판을 받아 오는데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그 모세를 보는 자들이 두려워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서는 얼굴의 광채가 나는 그대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전하고 나서는 광채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 광채는 영원한 광채가 아니라 점점 사라질 광채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나는 그 없어질 광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얼굴에서부터 나는 광채에 현혹되어 신앙의 본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 본문에 바울이 율법에만 집착하여 그 율법이 가리키는 바,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어두운 심령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면 그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완악한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광채가 난 모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모세를 대적하여 죽이려 했는지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동안의 과정을 통하여 잘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왜 가려져야 하고 정죄하며 죽이는 직분인 옛 언약의 의문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내용의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법을 가지고 판결을 하는 판사에게 있어 그 영광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이 그 판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원이 신뢰를 잃게 될 것이고 도리어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법은 인간들이 만든 법과는 달리 거룩한 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무조건 선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시고 그 법으로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신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선하신 하나님의 법대로 공정하게 집행자는 자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천지보다 하나님의 율법 한 점이 더 귀한 것입니다. 율법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는데 그 안식일에 나무를 하러 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세상 적으로는 큰 죄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런 자를 돌로 쳐 죽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성취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자신이 내린 율법의 저주를 자신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는 영광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자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하는 자리이기에 공의가 성취되는 영광만이 아니라 의롭게 하는 영광도 나타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긍휼과 공의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 맞춘 자리인 것입니다.

 

2. 수건 벗은 자

이제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2-14) 소망이 있다고 하는데 그 소망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장차 없어질 영광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가렸다는 것입니다. 왜 수건을 가렸는가 하면 그들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의 일꾼인 사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수건과 같은 것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3-15) 의문에 쓴 증서는 우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의문을 도말하시고 제하여버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는 장래일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런 그림자를 붙들지 말고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3:14-15)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한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바울사도가 한 저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6-10) 그런데 바울 당시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도 수건이 가려진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자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무엇을 다 이루었습니까? 죄로 인한 정죄를 다 받으셨고,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대속도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완성을 믿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행위로 무엇을 더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 십자가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영혼은 구원하였지만 십자가에 죽어버림으로 육신은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의 선행공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묘하게도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구원은 믿음으로 성화와 복과 상급은 행함으로 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구약에서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이제부터는 새 사람이 되었으니 바르게 행동해야 되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행동 되어지는 것입니다. 새 새람이 은혜로 되어짐을 알기에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나 자신을 포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마땅한 증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는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연스러운 증상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영광의 직분

그럼에도 끝없이 우리는 자신을 행위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6-17)고 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수건이 벗겨진 것입니까? 과연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하십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고 손해가 일어나면 당장 드는 생각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법에 묶여 있는 것이며 자유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되고 병이 들고 실패하는 것이 저주가 아닙니다. 진정한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려고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집어넣기도 하고, 인간의 행위를 집어넣기도 하여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는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직접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러면 우리도 그런 영광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복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수건이 가려지듯이 복음에 가려져 있으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영이 임한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란 세상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여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는 그 십자가가 영광임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완성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증거 하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일꾼인 사도의 모습은 환난과 궁핍, 곤란, 매 맞음, 갇힘, 수고함, 자지 못함, 징계를 받는 자 같음, 욕됨, 가난한 자 같음,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이 보입니다. 모세의 수건이 가려진 자들, 즉 세상의 신이 복음이 비치지 못하게 가려버린 자들에게는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건이 벗겨진 자들은 이런 바울을 통해 항상 기뻐함과 부요하게 함과 영광과 즐거움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을 얼굴로 주의 영광을 봅니다. 그런 자들은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 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혈육이나 애씀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곳에 자유 함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 자유 함과 영광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이 근심과 가난과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이 보여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십자가의 영광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매일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모세가 자신의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덮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옛 언약의 의문의 직분이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영광의 자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새 언약의 일꾼이 모세와는 달리 수건으로 그 얼굴을 덮은 필요가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옛 사람의 행동과 새 사람의 행동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6. 우리가 생각하는 저주와 성경에서 말씀하는 저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7. 내가 주 안에서 수건이 벗겨진 자인가 아니면 아직도 쓴 자인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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