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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을 주관치 않고 기쁨을 돕는 자

본문 / 고후 1:23- 2:11

 

 

1. 믿음의 주관자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보았던 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성도란 서로서로가 돕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사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인 것입니다.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전1:23-24)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직접방문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아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당장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문제를 일으킨 자들을 치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편지를 보냄으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너희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도 주고. 직분자도 세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할 것입니다. 흔히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전도하고, 내가 세례주고, 내 손으로 집사와 장로로 세웠는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자기가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된 자들인데도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전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주에 보았던 말씀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셔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예’가 되는 것이기에 자기가 믿음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과는 달리 바울 사도를 근심하게 하고 대적하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전도하고 다녔는가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20) 여기에 고린도 성도들을 자기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사도들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목회를 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바울 사도의 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아무것이나 아멘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아무 것에나 아멘하게 하는 것은 결국 목회자가 자기 종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렇게 하여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치는데도 용납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교회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그런 분들이 설교를 하면서 반말을 하고 욕설을 하는데도 성도들은 아무 것에나 아멘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문제들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된 고린도 교인들이지만 자신이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게 된 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택하신 자들이기에 때가 되매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은, 주님의 일이며 바울 사도는 단지 그들을 돕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 도움을 주고받는 자

그러면 바울 사도는 일방적으로 돕는 자만되고 자신은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보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하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로 도우라고 합니다. 자신도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교회들이 연보를 하여 바울 사도를 도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서는 모습이 바울 사도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라도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또는 여러분이 다른 이의 기쁨을 도와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근심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성도의 교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부딪히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몸의 지체가 떨어져서는 결코 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우리는 마치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의 특징인데 교회에서 마저 그런 모습들이 만연한 것입니다. 그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위해 어떻게 기쁨을 돕고자 하는 것인지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고후2:1-3)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책망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근심하게 하는 것이기에 근심하지 않고 기쁨으로 만나기 위해 방문을 연기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기쁨은 성도에게 있는 것이지 세상이나 세상의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좀 쉽게 번역된 표준새번역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또다시 아픔을 주지 않아야 하겠기에 여러분에게로 가지 않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런 편지를 쓴 뜻은 내가 그리로 가게 될 때에 나를 기쁘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내가 마음 아픈 일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임을 나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확신 하였습니다”(고후2:1-3/ 표준새번역) 바울 사도의 기쁨은 성도가 믿음 안에 서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바울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이런 바울 사도의 기쁨을 다른 곳에서도 한번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6-13) 바울이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굳게 섰다는 것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에 무슨 다른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한 주간 만에 만나서 무슨 이야기로 꽃 피우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방금 읽은 이런 말씀의 내용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러워질 것들과 불에 살라질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정신없이 바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선 사람이라면 반드시 무슨 이야기로 꽃 피워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 안에서 나눔과 교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 안에서의 기쁨이 더하여질 것임을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 보면 이어서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가 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바울 사도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쓴 이 편지는 사라졌다고 봅니다. 아마도 그 편지를 받고서 고린도 교회가 회개를 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강력하게 범죄 한 자를 책망한 것으로 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범죄 한 자와 교제하지 말게 하는 것처럼 아마 교제를 금하였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이런 책망도 결국은 그들이 믿음에 서고 그 믿음으로 인해 기쁨을 더하게 하고자 함이지 책망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책망할 때에 정말 사랑으로 세우기 위해 하는지 남을 헐뜯기 위해 하는지를 돌아보면 그저 헐뜯는 일이 거의 전부 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 하고 돌아서면 나에게도 그런 허물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를 보려고 나서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는 누군가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책망을 받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완벽해서 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들도 이미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책망을 받고 은혜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함께 믿음에 세워지는 기쁨이 더하여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3. 주 안에서의 용서

계속해서 오늘 본문입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2:5-9)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는 바울만을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근심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다고 합니다. 그 벌이란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제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리고 이제 그 벌 받음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그로 하여금 벌 받게 하면 많은 근심에 사로잡힐까 염려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근심하게 하는 책망이 회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근심은 사망에 이르지만 이런 근심은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함을 통하여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용서한 일이라면 바울사도 자신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용서 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죄인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 사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사단에게 속지 아니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사단의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단의 궤계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늘 참소하는 자입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작은 것도 부풀게 하여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궤계입니다. 그러한 사단의 궤계를 이기는 것인 바로 용서의 위력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입니다. 이 용서의 위력 속에서 서로 기쁨을 돕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앞에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 있는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2-13)고 하신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근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그 기쁨을 돕는 자로 부름 받고 세움 받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말 한 마디가 또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주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삼아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지체들에게 기쁨이 되는지 아니면 근심케 하는 것인지 돌아보시고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나 혼자만의 만족과 기쁨이 아닌 주 안에서 하나된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기쁨을 충만케 하고 돕는 자로 세워져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들로 세워져 가는 주 안에서의 아름다운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믿음으로 주관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까?

3. 사도 바울이 교회를 바라보며 기쁨이 되는 내용과 우리가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4. 우리가 이웃에게 무엇을 하든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은 무엇입니까?

5. 주 안에서의 근심과 세상의 근심을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6. 바울이 용서를 말씀하는 이유와 사단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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