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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누구를 좋게 하랴

본문 / 1: 6-11

 

 

1. 인간의 종교

오늘 말씀은 지난주와 같은 본문입니다만 지난주에 다 전하지 못한 말씀이 많아서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말씀과 복음은 사람을 좋게 하지 않는 다는 말씀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원래 복음이라는 말이 복된 소식인데 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씀인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복음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만 알아들을 말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사람을 화나게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냥 복음만 전해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선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만 알아듣는다고 하는 이 일방적인 선택사상이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우리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욥이 자신은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고난 받는다고 항의를 하면서 하나님께 따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천지를 창조할 때에 너 어디에 있었느냐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 욥은 입을 닫고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욥의 회개가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릅니다. 자신이 신이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택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의 신이 됨을 공고히 해 나가는 게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것을 모르기에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쉽게 말하면 선도 악도 행하지 아니한 중립상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을 행하면 선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간다고 여깁니다.

또 내가 악을 행하면 이 세상에서도 벌을 받고, 죽어서도 나쁜데 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의 목적은 신을 잘 섬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을 잘 섬김으로 내가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신 까지도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다 착하게 살라고 합니다.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는 하지만 그것은 죽은 다음의 이야기이고, 지금 살아 있을 동안에는 종교를 가지고 사람들끼리 서로 착하게 살자고 종교에서 만든 경전을 공부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이 오늘 이 시대에는 인기가 있으며 또 그것이 진리와 생명만이 선포되어져야할 교회에도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의 실체와 복음

이런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고 이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 곳이라서 멸망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런 말씀들이 과연 기분 좋은 소식, 즉 복음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땅과 우주 만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 분을 인간들이 죽여 버렸습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자신이 주인 노릇 하려고 주인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2:1-12)고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포도원을 가꾸는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입니다. 물론 여기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된 것은 모든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세를 받으려고 보낸 종들은 선지자들이며, 마지막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세상의 권력과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악한 세대이며 다 진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면서 나는 진멸 받아 마땅하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교회를 수 십 년을 다니면서도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이라고 고백하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말은 썩 기쁜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옥 가는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 마지못해 일수 찍듯이 교회는 와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그 어떤 행위로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피를 뿌림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이 얼마나 배타적이겠습니까? 인간의 애씀과 노력과 달음박질이 아무른 소용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9장에 보면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3-16)고 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 받을 자와 사랑 받을 자가 결정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원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이 말씀에 분노가 일어나는 사람들에게 바울사도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원래 흙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아담이란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으셨지만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 해체되는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질그릇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내가 이제 너를 긍휼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시겠다고 찾아오시면 이것은 정말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진노를 받아 마땅한 흙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높아지기를 원하고 높아진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인간이기에 이러한 복음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고는 하면서 그런 인간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됩니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좋아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오늘날의 교회가 제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이런 것을 감당 못하니 다른 특화된 상품으로 돌파구를 마련하여 이마트의 상품진열대처럼 골라잡게 합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상품들, 즉 제자 훈련, 영성 훈련, 신비주의나 금욕주의 같은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배운 것만큼 여러 단계를 만들어 둡니다.

인간은 그런 단계만 정하여 놓아도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더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인간들에게는 프로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돈도 들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에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버린 세상인 것입니다.

 

3. 우리가 받은 복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다시 말라기 1장에 보면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1:1-5)고 합니다.

이 부분을 지난주에 말씀드리지 못하여 오늘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며 대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죽도록 고생을 했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에서는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부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사병은 318명이지만, 에서는 400명입니다. 에서는 고생 안하고 부자 되고 강한 성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자가 됩니까? 하나님께 미움 받았다면 하는 일이 다 저주와 실패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 부자로 강한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저주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려도 자기들의 힘으로 다시 쌓겠다는 것이 저주 받은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모습이 저주 받은 모습인 것입니다. 성벽을 강하게 하여야 하고 군대도 모아야 하고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야하는 상태가 저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온갖 꾀를 다 쓰고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이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에 도망가서 자기 몸을 의탁합니다. 외삼촌이 품삯을 정하라고 하자 7년을 일할 테니 라헬을 달라고 합니다. 첫날밤을 지내고 보니 레아입니다. 속았습니다. 다시 7년을 더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일주일이 지나고 라헬을 아내로 주지만 다시 칠년을 더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6년은 자기 품삯을 위하여 일하여 재산이 늘어납니다.

그러나 가정은 늘 싸움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자매가 한 남편을 맞았는데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서 자식을 낳게 하십니다. 이것을 질투하여 자기 종을 주고 서로 자기 종을 주어서 아내가 무려 네 명이 됩니다. 어느 하루인들 야곱이 편한 날이 없습니다. 남편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일어나고 그래서 나온 12명의 아이들의 이름이 전부 시기, 질투, 경쟁하면서 나온 이름들입니다. 얍복강에서 환도 뼈가 위골되어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 됩니다. 이때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뿐 아니라 딸이 강간을 당하고 더 심한 것은 장남이 아버지의 첩을 건드리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또 사랑하는 아내는 먼저 죽고 늙어서 얻은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늙어서는 밥을 얻어먹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이 바로 왕을 오히려 축복하면서 자기의 인생이 험악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움을 받은 에서는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이 죽을 때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데리고 옵니다. 장자를 야곱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기의 왼손에 차남은 아버지의 왼손의 축복을 받도록 요셉의 오른 손에 잡아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늙어서 눈이 먼 야곱이 손을 어긋맞게 축복을 합니다. 요셉이 손을 바꾸어 놓으려고 하자 야곱이 나도 안다고 하면서 축복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과 다릅니다. 사람의 복과 하나님의 복이 다릅니다. 사람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이 무엇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죽을 때에 자기의 해골을 아브라함의 무덤에 장사지내라고 합니다. 자기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무덤에 묻어 달라고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 안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약속 하나 붙들게 하기 위하여 야곱은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언제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까? 형편이 좋을 때 십자가를 붙들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데 성령이 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환난이며 고난입니다. 이런 과정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십자가는 부적이 되어 있습니다. 반지로 목걸이로 자동차에도 붙이고 다는 부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 하면 욕부터 먼저 나오고, 끝까지 따라가서 가로 막아야 하면서 십자가는 붙이고 다닙니다. 그러려면 십자가를 붙이지 말든지 도대체 십자가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저주 받아 죽은 처형형틀입니다. 그런 형틀을 예배당 꼭대기마다 세워두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비행기로 서울에 내리면서 웬 공동묘지가 이렇게 크냐고 했답니다. 서울하늘을 붉게 물들인 네온사인 십자가를 보고한 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전부다 침을 뱉고 돌아서야 할 그 십자가를 짊어짐이 은혜라고 나오는 자들은 과연 자기들의 능력이겠습니까?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십자가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런 은혜의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만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복과 법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게 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좋게 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섞으면 그것이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다가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율법주의가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좋게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부러 불친절하게 대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은 원래 사람들이 좋아 하지 않는 거라고 하면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친절하게 대하고, 겸손하게 대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전하여도 복음은 복음 자체가 갈라놓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일부러 사람들을 좋게 하지 않아야 복음이 되는 양 여기는 것은 착각입니다. 일부러 마음대로 행동 하고 남을 정죄하고 욕하면서 원래 복음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만 전해도 반드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의 능력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고 합니다.

바울이 자기 형제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도 그들이 돌아온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패가 저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저주받았다고 하는 그런 삶이 저주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여 진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1-39)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의 어떤 환난과 고난과 죽음과 실패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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