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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어린 양

본문 / 1:29-34

 

1.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점검해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맞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극히 소홀한 생각을 가지는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잘못된 앎은 결국 잘못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할 뿐입니다. 잘못된 앎에서 참된 믿음의 모습이 보여질 리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오직 참된 앎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과연 참된 것인가를 점검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앎에 있어서 그 범위가 매우 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구세주 또는 독생자 등등 몇 가지의 답만 나열하면 되는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답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상식에 머무를 뿐이지 그 앎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아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임을 안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사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증거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허물을 안다면 그는 자기 의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누군가를 대했을 때는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자로 있고 싶어한다면 그가 과연 진심으로 자신의 허물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 깊이 인정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말은 맞지만 다만 기독교인의 상식에서 나온 말로 그쳐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참된 앎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내가 곧 죄인이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를 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 앎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앎이 결코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요한의 말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세상살이를 도와주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인간의 본성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우리 인생을 도와주는 그리스도가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더 관심이 있고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채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결코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에게 마음이 갈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상식에 머무르고 있는 그리스도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26절부터 보면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1:26-27)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언급하면서 물로 세례를 주는 자신보다 뒤에 오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에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인간이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물세례는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고 성령은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곧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베풀고 나서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신의 실체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와 그 죄의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그에게 예수의 겉모습은 보일지언정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결코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야 할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임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본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만이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죽음을 해결해줄 유일한 통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으로 귀한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하면서 과연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에 개입되어 있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밖으로 밀쳐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밖으로 밀쳐내어 있다가 내가 필요로 할 때만 개입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편리한 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과연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분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앎을 과연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앎이 참된 것이라면 분명 그는 자신을 죽어야 할 인생으로 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임을 진심으로 마음 깊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다만 그리스도를 믿을 것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되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다면 세례 요한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차라리 보라 세상에서 인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소개는 듣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만한 말이 아닙니다. 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별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자기 인생에 덮여 있는 죄로 인한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발견한 자에게만 그 그림자를 걷어주실 구원자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보지 않고 자기 인생에 덮여 있는 죽음의 실체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없고 대신 인생을 도와주는 그리스도 아닌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만 앎

오늘 본문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1:31)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하면 요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32절에 보면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1:32)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만큼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요한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내려와 그 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게된 요한의 지식은 육체적인 지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된 지혜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위로부터 요한에게 계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1:33)라고 하는 말씀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자가 곧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 다시 말해서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리신 것은 단지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큰 능력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성령세례인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긴 성령을 무슨 큰 능력을 부여하는 분으로 오해를 하고 있으니 성령을 받았다는 성령세례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큰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였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행적은 성령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일이라면 오늘날도 성령은 자기 백성을 예수님과 같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령이 내리신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시는 이유는 신비한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곧 성령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인간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했다면 그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해서 성령에 붙들린 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의 물세례는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보지 말고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통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면 죽어야 할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살리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에게서 어린양이 지고 있는 세상 죄가 누구의 죄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죄가 아니라 바로 내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바로 세상 죄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그 죄를 지고 가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은혜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진정한 신자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주님의 은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자연히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분이라면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소홀했으며 죄 가운데 죽어야 할 비참함이 나와 관계가 없는 일처럼 여기고 살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고 가신 세상 죄에 해당된 자가 바로 내 자신임을 보지 못할 때 어린양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또 소중함의 가치도 없는 다만 이름만의 그리스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진정한 고백 위에 우리의 실체를 아는 거룩한 시각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이 고백과 지식으로만이 아닌 참된 앎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며 또 우리의 삶에 간섭과 참견으로 가득한 복된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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