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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

본문 / 5: 1- 5

 

1. 구원에 대한 착각

오늘날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의 길을 막아 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현실을 무시한 채 천국을 생각하고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하면 쉽게 들어가지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의 노력과 정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애당초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의 뜻은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한시적인 징벌이 아닙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계속 되어지는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징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의 그 어떤 행실과 정성을 가지고도 이 징벌을 해제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 역시 인간은 들어갈 수 없도록 막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절대로 인간에 의해서는 열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천국을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일어났던 이 엄청난 사건을 무시해 버리고 천국을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잘하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도 모른 채 '천국'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허용 여부는 하나님께만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전권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함에 이양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에 많은 자가 속아 넘어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종교인이 교회마다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에 대한 문제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은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시행되는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개입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쓰여지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그 어떤 행위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조건이 된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위에서 의가 되는 부분을 골라내서 그것을 조건 삼아 천국의 문을 두드려 보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악이 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난 존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그 내용이 더욱 깊이 이해될 것입니다.

 

2. 우리 관심사

먼저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두루마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고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구시겠습니까?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요한이 본 보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궁금증은 그 두루마리가 과연 무슨 두루마리냐에 쏠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바로 생명책입니다. 그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기에 생명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계시록 3장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고 말씀합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을 보면 생명책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이름은 이긴자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겼으니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 전의 택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우리가 이겨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기 때문에 이긴 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기는 것도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도 나를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도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생각해봐야 내가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길 뿐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이긴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모두가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성령님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늘 백성에게 보내서 이 긴자로 살아가게 하시겠습니까? 우린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천국 백성으로 삼았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천국에 보내는 것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백성에게 성령님을 보내서 이긴 자로 살게 하시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계시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한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 때,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좋아하기보다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천국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완성된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을 천국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을까?'에 대해서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책을 말할 때 '내 이름'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또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구원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이 생명책을 손에 쥐고 계신 그 뜻'을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둬야 할 것인가를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생명책이 있는 것은 생명책에 적혀 있는 이름을 공개해서 하늘 백성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목사들이 생명책을 이용해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고 하면서 교회에 봉사와 충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책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구원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심판을 말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1:7)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그를 찌른 자들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찔렀던 자도 본다는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그를 찔렀으니까 세상은 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 찔렀잖아 그래서 너희는 망할 자다'는 것이 찌른 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신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 1장에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기 때문에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신자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와 사랑을 받아 세상의 복을 받아 누리고 능력을 행하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세상을 향해서 심판을 보여줄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자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책이라는 것도, 우리가 잘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거나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이름이 기록된 자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누구 이름이 기록 되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생명책과 다른 책들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생명책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 행위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자고 했습니다. 쫓겨났기 때문에 생명에 대해서는 인간은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오직 영원한 멸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이 이름이 기록된 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뭔가 잘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기록되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버린 하나님의 처사가 불공평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누구에게는 막혀 있고 누구에게는 열려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이라는 것은 '구원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는 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계시록 20장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20:12)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린 다 죽을 것이고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느냐 하는 것을 지금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하늘에서 있을 일을 지금 미리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장차 있을 일을 미리 안다면 지금 살아 있을 때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저주가 되는 쪽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시록 2012절 말씀에 보면 죽은 자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 우리는 책하면 생명책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 생명책 외에 또 다른 책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분명히 책들이 펴졌고 또 다른 책이 펴졌다고 말합니다. 분명 두 종류의 책입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책은 단수로 책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책은 복수로 책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책들은 무슨 책들이며 또 그 책들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12절 하반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책들에는 죽은 자들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명책에는 하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책에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구원의 기준이 인간의 행위라는 잘못된 결론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은 생명책 말고 다른 책들입니다. 즉 보좌 앞에는 생명책이 있는 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 펴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아하, 세상에서 살았던 우리 행위를 보고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분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책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 돼버립니다. 행위를 기록한 책들을 보고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다면 생명책에 하늘 백성의 이름을 기록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생명책이 있으며 구원은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 한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생명책이 있음으로써 인간의 행위가 구원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행위가 기록된 책들에는 나쁜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위가 다 같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구원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생명책이 있음으로써 증명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항상 말씀하시는 대로 인간의 행위에서는 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위대로 기록된 책들에서는 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이 없기 때문에 행위대로 한다면 모두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20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 불못에 던지움을 당하는 자는 주일을 안 지킨 자가 아니고, 십일조를 안 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의 행위와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결국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지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인 떼실 분

그런데 이 생명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일곱 인이라는 것은 세상의 운명을 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 인이 떼어지면 세상의 운명이 어떻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운명의 기준은 생명책이 펼쳐 짐으로서 드러납니다. 세상이 망해야 한다면 왜 망해야 하는지, 그 기준이 생명책이 펼쳐 짐으로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뭐가 생명이고 뭐가 심판인지는 책을 펴고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이 오셔서 책을 펼 때 인을 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5:5)고 말씀합니다. 요한이 생명책을 펴거나 볼 자가 세상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웁니다. 그러나 24장로 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다윗의 뿌리가 책을 펴고 일곱 인을 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뿌리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책을 펴고 인을 뗀다는 것은 생명책에 적힌 대로 반드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야 말겠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피를 흘리는 것인데 그 피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잘했니 못했니'라고 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의 생명과 심판은 예수님의 피가 기준 되어서 구분 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의 피도 생명과 심판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5:3)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그 어디에도 세상 운명의 기준이 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인간의 노력과 희생을 다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생명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예수님이 책을 펴고 인을 떼신 상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가 오직 생명임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그 피를 믿는 자가 바로 생명책이 기록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리기를 생명책을 내 구원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생명책이 있는 것은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자기 노력과 자기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생명임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신자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심판받을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자기 행위에 기대를 건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예수님이 건지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일을 무시하고 자기 행위에 눈을 돌린 자는 모두가 불못에 던지운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행위를 고집하는 인간은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행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생명이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 속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운명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살았던 예수님의 삶, 그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돼 있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예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자기 힘과 자기 노력을 믿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라는 것이지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가 없는가를 점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이미 창세 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예수님을 마음껏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그것은 세상의 실체와 운명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실체와 운명을 아는 자답게, 왜 세상이 멸망을 받는가를 아는 자답게 세상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십시오. 생명책을 펴기에 합당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내가 잘했다'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어린 양에게 드릴뿐입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 앞에 선 우리 모두에게 생명책에 기록된 하늘나라 백성의 모습만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신자들이 천국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인간의 범죄와 구원과 생명의 문제까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무엇이며 또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사람들이 생명책에 이름의 기록 여부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이라고 하며 그렇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진 책은 무엇이며 또 생명책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7. 생명책 외에 다른 책들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8. 봉인된 일곱 인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인을 뗄 분은 누구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9. 오늘날은 어떤 상태라고 말씀하며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10. 오늘날 신자인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어떠한 삶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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