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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둘째 인

본문 / 6 :3- 4

 

1. 존재 이유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잘나고 인정받고 뛰어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 이유보다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아예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쓸데없는 일로 여겨버립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할 일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힘쓰는 것이 더 생산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낸 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존재 이유'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분의 의도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까지 포함된 생각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존재 이유에 대한 생각은 자신이 계획하고 꿈꾸는 인생이 아닌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따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존재 가치란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으며 또 그 이름이 얼마나 유명해졌느냐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의도에 얼마나 맞게 살아가고 있느냐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약 자신이 보냄 받은 인생임을 인정해 버린다면 '내 인생'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보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가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것입니다. 신자는 우연히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태어나게 하신 분이 있으면 그분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만약 보냄을 받은 인생임을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라고 인정하는 그가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자는 자기 존재 이유에 대해서 확고한 답을 내리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신자는 그냥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삶입니다. 나를 세상에 보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고히 아는 자가 신자라면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인생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우리들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단지 '천국 보내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되는데, 왜 아직까지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쉬고 살아가면서 과연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세상을 좀 더 편하고 안락하게 그리고 많은 것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내가 날마다 숨을 쉬며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희미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서 얻어낼 궁리에만 열심이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나 마음에는 멀어진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전혀 쓸데없는 일에 집착을 하고 열심을 내면서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또 자신의 이름을 내는 인생이었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비된 시간들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많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세상에 심판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 이유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켜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 목사의 존재 이유가 아닙니다. 목사는 목사 일을 하면서 세상의 심판을 보이는 것이고, 신자는 신자로서 직장을 다니고 열심히 일을 하면서 죄를 모르고, 심판을 모르는 세상에 죄를 보이고 심판을 보이라고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임할는지 모르기에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그 심판의 세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살았던 것처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았던 것과 똑같은 상황과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원칙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삶의 원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던 세상의 죄가 예수님의 삶의 원칙을 따라가는 신자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뇌물 받는 것을 세상은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뇌물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면 뇌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은 세상적인 양심과 도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돈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자연히 뇌물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탐욕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파견 나온 사람입니다. 파견이라는 것은 그쪽에 가서 그쪽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의 일을 그쪽에 가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신자는 하늘나라 백성이지만 몸은 세상에 머물면서 하늘나라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일이란 세상의 죄를 보여줌으로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악한 세상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왜 태어나야 합니까? 그 이유는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라고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에스겔이 악한 세상에 왜 등장을 합니까? 이스라엘이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상에 오셔야 합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세상이 왜 심판을 받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신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세상이 왜 심판을 받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2. 둘째 인

요한계시록 6장부터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도 그런 의도에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하늘에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일곱 인이고, 일곱 나팔이고, 일곱 대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6:3-4)고 말씀합니다.

둘째 인을 떼자 붉은 다른 말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탄 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허락을 받아서 한다고 합니다. 바로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세상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죽인다는 것은, 살인하고 전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의미의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히 천사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세상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을 한다면, 결국 세상이 화평하게 살지 못하고 서로 죽이고 시기하고 다투며 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냐는 결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서로 화평하게 살도록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라는 것이 인간의 신에 대한 상식인데, 오히려 반대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때 힘든 일이 왜 있으며, 나는 잘하는데 나를 욕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자들이 왜 있게 되는지 그리고 열심히 하는 데도 실패하고 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전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세상에 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세상에 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선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니까 인정한다기보다는 세상을 보고 나를 보니까 분명히 선은 없다는 확실한 답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만 합니다.

분명히 세상에 선은 없습니다. 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세상이 죽임으로서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의 어둠과 죄가 폭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은 자신만을 사랑하며 산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결국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선이 없는 세상에 화평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화평을 단지 서로 마음이 맞는 인간들끼리 어울려서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평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참된 화평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포기 되어지지 않은 한 화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할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서로 화평하게 지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이상적인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보기 위해서, 환상에 빠지고 착각 속에 살아가는 목사들이 사랑을 말하고 섬김을 말하고 나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모여서 서로 마음을 잘 모아서 사랑하고 섬기고 나눔으로서 천국 같은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천국 같은 교회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교회는 부흥한다는 노림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 속에 천사가 뛰어들어서 '화평, 사랑, 섬김, 나눔'이라는 인간의 환상과 착각을 깨뜨려 버리고 인간들이 속에 감추고 있는 죄를 폭로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화평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세상은 화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관계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화평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부간의 갈등이 많이 있습니다. 왜 고부간의 갈등의 발생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돌립니다. 시어머니가 너무 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그 원인을 돌립니다. 며느리가 시어미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것입니다. 결국 갈등의 원인을 서로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은 한마디로 하면 자기 사랑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모두 다 거부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화평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화평이 어떤 것인가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23:34)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대할 때 쉽게 예수님이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다고 여겨버립니다. 사랑이 많은 예수님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님 다운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는 충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사랑을 포기 못한 인간이 예수님과 같은 일을 당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에 하늘의 천사를 불러다가 그들을 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할 뿐이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에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화평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쟁이란 자기 사랑끼리의 충돌입니다.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자기 사랑이 없다면 분쟁은 없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사는 쪽의 일방적인 공격과 미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으로 살지 않는 쪽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랑으로 사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오직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핍박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신 것은 그 모든 것이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화평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 화평을 보인 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60)고 합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외친 소리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이라면 억울하게 죽는 순간에 그들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분명히 지옥갈 것이다'라는 식으로 저주를 하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자기 사랑에 빠져 사는 인간이 모여 사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 화평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화평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살아가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속에 천사가 뛰어들어서 쑤셔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우애가 좋다고 소문이 난 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소유한 땅이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린벨트가 해제되는 바람에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그럴 때 뭐가 깨집니까? 형제 우애가 깨지고 화평이 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땅의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한다는 본문의 의미입니다.

원래는 화평이 있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화평이란 없는 세상인데 화평을 흉내를 내면서 인간의 자질을 내세우는 그런 세상에 천사가 뛰어들게 해서 자기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 때문에 드러날 수 있고, 자식 때문에 드러날 수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화평이 없다는 것을 인간이 서로 다투고 분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집어넣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봐라, 너희들 못됐잖아 그러니까 서로 다투고 죽이잖아'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들 사이에 이런저런 일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 진짜 화평이 있다면 그 무엇으로 깨어지면 안 됩니다. 돈이 개입돼도 화평은 확고해야 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화평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이 과연 이런 화평으로 사는가를 묻는 것이 둘째 인입니다.

 

3. 신자의 삶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치 하나님과 내가 화평한 관계로 지내는 것처럼 생각하던 것도 착각이었음이 언제 드러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 때 드러납니다. 우리로 실패하게 하고, 우리 생각처럼 되지 않게 하고 또 우리를 넘어지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외침이 나오게 함으로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살았던 우리의 본질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란 하는 일마다 실패해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박국서 3장에 보면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3:17-19)고 합니다. 자신에게 되는 일이 없어도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이러한 고백은 자신에게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생의 중요한 분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죄를 아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죄를 알게 될 때 그래서 자신의 무능과 멸망이라는 처지를 자각하게 될 때 단 하나의 유일한 해결책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수시로 자신의 무능과 죄악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처지와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하시는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도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랑 없음이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사랑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실패는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공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위대함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실패가 있고, 괴로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를 괴롭히는 자를 있게 하시고, 힘들게 하시는 모든 이유가 우리를 세상을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화평이 없으면서도 화평한 척하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인간의 선을 주장하고 인간의 자질을 의지하는 세상의 죄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는 둔감해져야만 합니다. 내 이익보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이나 사도들 모두가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삶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는 착각이고 환상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주어진 인생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세상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가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신자와 불신자의 삶의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다르다고 말합니까?

 

3.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며 또 신자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비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신자가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드러난 세상의 실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우리가 생각하고 화평은 무엇이며 또 그것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우리에게 진정한 화평이 만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진정한 화평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본문에 붉은 말을 탄 자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그 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에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평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또 그것으로 무엇이 드러난다고 합니까?

 

12. 하나님께서 신자를 세상에서 통로로 사용하시면서 신자를 존재케 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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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 2023 6월 4일 / 요한복음 5. (요 1:19-28) 세례 요한의 증언 관리자 2023.06.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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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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