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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무엇을 구하느냐

본문 / 1:35-42

 

1. 소망과 욕망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망과 욕망을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에 불과한 것을 소망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욕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보다는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뭔가 옳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소망이란 하나님이 주시고자 약속하신 것을 마음에 소원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소망의 실체인 것입니다. 반면에 욕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고 내 쪽에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성취되지 않았을 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고 절망을 하게 합니다. 설사 욕망이 성취되었다고 해도 그 성취는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욕망으로 나아가도록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라고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참된 소망은 때로 넘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환경 속에서도 삶의 목표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소망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것이기에 세상에서 넘어지고 좌절할 일이 있다 해도 참된 것이 무엇이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잃지 않게 하기 때문에 힘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망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의 성패가 중요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두고 생각할 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내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가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소망과 욕망을 혼동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에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은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1:38)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증거를 듣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누구를 구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증거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사실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은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상황에 맞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 아니라 '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좇느냐?'가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을 좇는 제자들에게 맞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리스도를 구합니다'는 답을 하는 것이 상황과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가 아닌 '무엇'은 그리스도 말고 그리스도에게서 구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 마음에 다른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아시고 그것을 드러내시는 질문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1:38 /공동번역)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을 보겠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어떤 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라면 그분에게서 구할 것은 죄 사함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답변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였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1:38 /표준새번역)고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대답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질문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답을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었으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가 어디 묵고 계시는가를 되묻는 것입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요한이 소개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닌 선생, 즉 뭔가 가르침을 배울만한 학식이 있는 스승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어디 계시는가, 즉 기거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물어 알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에게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증거 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죄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히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태를 가리켜서 비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비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고통에서 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영원한 고통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다만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에서 멀어진 인간이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증거물들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고통에서 살아가게 된 인간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영원한 고통에서 건져내시는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영원한 고통에서 건짐 받는 것이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것 외에는 없음을 안다면 그런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복과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하늘의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한 영원한 고통을 아는 자라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무어라고 답하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알고 주님을 따르는 자였다면 주님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를 구하느냐?' 라고 물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배로우신 분입니다. 이러한 보배로우신 분 앞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 앞에서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돈을 구한다거나 세상일이 잘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구든 그러한 구함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주님이 지고 가시는 죄도 보지 않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신만을 보고 그리스도만을 외치며 찾을 뿐입니다. 즉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서도 현재의 내 삶을 위해서 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이루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는다고 외칩니다. 뭐든지 자기 생각대로이고 자신의 마음대로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없고, 온통 내 쪽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들이미는 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바란 것은 주께서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는 보지 않고 자신들이 누릴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잔과 죽어 다시 사는 세례를 모르는 너희들이 어찌 자기들이 바라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것이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를 불러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소경은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을 향해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하십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이나 자신의 눈이 뜨이기를 바라는 소경이나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이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소경을 내세워서 제자들이 지금 진심으로 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소경은 자신이 소경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소경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경임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기를 원한다는 그 구함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경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소경임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다만 선생인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생인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번 배워보자는 것이고 들어서 배울만하면 예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요한의 말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을 찾는 신자임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본다면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는 것이지 세상에서의 자기 영광을 주님에게 구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신자라면 주께서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를 구할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생명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다는 것 자체가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소원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열 시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1:39)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묻는 제자들의 의도를 아시고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고 그때가 열 시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 시가 무슨 뜻이냐'보다는 왜 시간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인생의 변화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몇 시에 변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한 것이 바로 그들의 인생의 변화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 우리가 거듭나거나 구원을 얻는 시간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의 변화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좇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나 삶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오늘 예수님은 뒤돌아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과연 무엇을 구하십니까?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속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좇는지 아니면 자기 영광을 구하면 들어줄 그리스도를 좇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도든 예수든 전혀 관심 없이 다만 좇는 척하고 믿는 척할 뿐인지 우리가 스스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길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비참임을 알고 있다면 인생에서 최대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망과 비참에서 구출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망과 비참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불의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망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망과 비참함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진심으로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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