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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도

본문 / 5: 8

 

1. 무지한 기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자신의 탐욕이 충족되어지는 가운데 발생하는 일시적인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 오는 만족감에서 기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그 그 느낌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갖게 되었을 때 오는 만족과 성취감이 어우러져서 느끼는 기쁨을 행복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내가 소유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등장할 때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드리는 것은, 세상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이란 세상 것을 얻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 것을 버림에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라고 하여 자기 자신이 스스로 행복을 얻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알게 될 때 그것이 곧 행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행복할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모르기에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의 운명은 행복이 아니라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고 산다고 해도 인간은 결국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뒤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 운명을 알아야만 합니다. 죽는다는 것이 나의 운명임을 알게 될 때 죽는 것이 당연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들은 놀라운 자비와 은총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죽는 것이 당연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드리워지는 햇살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전달하고 있는 피조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죽는 것이 당연한 인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거룩하고 귀하신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운명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죽고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부여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의 행복인 것입니다.

죽는 것이 당연한 인간이 세상을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손에 쥐고 있어봐야 몇십 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명은 영원입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신자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꿈이 포기 되어질 때인데 그것은 가장 가치 있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알았을 때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그리고 그 성경을 설교하는 내용은 항상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행복을 포기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마셔도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것은 마셔도 또다시 목마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은 기쁘겠지만 또다시 목말라집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탐욕이 내 속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는 목마르지 않은 생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해서 구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구하는 것과 같은 자기 행복을 위한 기도를 하겠습니까? 즉 세상 것을 얻음으로서 누리는 행복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함으로서 한탄을 하고 고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민과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즉 자기 문제를 들고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에는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초조하게 됩니다. 응답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주일은 잘 지켰는지 혹시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있는지, 목사님을 잘 섬기는지, 교회에 봉사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기준을 세워 놓고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기도 응답에는 분명 조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도응답 받는 비결'이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자가 기도한다면 그 기도 또한 자기중심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내 가정을 위하고, 내 자식을 위하고, 내 교회를 위하고, 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모든 것이 나와 연관된 것들뿐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목적은 자신이 잘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과연 나사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입니까 아닙니까? 스데반 같은 경우도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결코 잘된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내가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조건입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높여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 영광의 비밀을 모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 줄도 모른 채 온통 자기 잘 된 것을 자랑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이번에 내 자식이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과연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의 속셈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아니면 내 자식이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분명히 후자가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식이 성공하는 것은 나의 탐욕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공을 못해서 그냥 빌빌대면 안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욕을 먹는 것이고 영광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가 전부인 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체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미신과 무당이 난무한 우상의 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기도가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듣지 않는 기도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5:8)고 합니다. 두루마리를 취한 어린양 앞에 엎드려 있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 대접에 가득한 향을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늘에서 귀하게 여김받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가 어떤 기도인가를 아는 것이 오늘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편 66편에 보면 “15.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 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5-18)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사와 기도가 함께 등장을 합니다.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는 말씀은 제사를 말하는 것이고,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듣지 않으시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와 기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을 품은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와 기도는 받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죄를 품지 않은 마음으로 드리면 되겠네'라고 쉽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인간이 죄를 품지 않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5:17-20)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 없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죄 있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와 기도는 더럽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담당했던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죄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희생의 피로 자신의 몸에 바르고 나서야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제물의 피 때문에 살아난 죄인이다'는 것을 전제하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론은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도 기도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이런 말이 혹시 예배와 기도 폐지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와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하나님이 안 받으니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은 인간의 것은 안 받는다는 것을 전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것은 받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의 것은 받으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 되어 드린 제사, 예수님의 기도는 받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할 필요가 없는 거룩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데 왜 성경에서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도 들으셨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생명을 연장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먼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성경에서 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분의 제사와 기도만 받으시니까 죄 있는 인간의 제사와 기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아닌 예수님의 기도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죄를 품지 않은 분의 기도가 되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나는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살아 있지 않습니다. 내 포부와 소망이 죽은 자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신 나라가 소망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산다면 그분의 소망이 곧 우리의 소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내 소망이 죽고 그리스도의 소망이 내 소망이 되어서 나도 역시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에게 내 뜻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내 뜻이 포기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뿐입니다. 이런 신자가 기도할 때 과연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소망이 나의 소망되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까?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이 포기되어진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제사와 함께 기도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제사란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데 나 대신에 제물이 희생하는 현장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로 죽어야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나오는 행위가 제사이며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란 '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자기 뜻이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의 뜻에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종 역시 자기 뜻이 없습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과연 그러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현장이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땅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지기 위한 현장이지 절대로 인간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현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기도일 것이고, 하나님은 죄를 품은 마음으로 기도한 나의 기도는 절대로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 저주를 쌓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통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뜻을 내세운 기도를 함으로서 내가 바로 저주받을 자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기도는 내 욕심과 내 뜻은 중지되고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도록 요청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부인된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금 대접에 가득히 담긴 향기로운 성도의 기도는 자기가 부인 되어진 기도인 것입니다.

40일 금식기도 했다고 해서 향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철야기도를 했다고 해서 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기도는 내가 죽은 기도입니다. 내가 포기되어진 기도만이 향이 됩니다.

 

4. 신자의 기도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내가 포기되어진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조그만 것 하나라도 이용을 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이 높여지기를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높아지면 예수님의 이름도 높아지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내 이름은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자랑되어지는 현장에서는 예수님이 높임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채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할 때 그는 분명 기도해서 병이 나은 자신의 경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성도라면 비록 병이 나아도 죽는 것이 인생임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병 나은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병들고 또 병이 낫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병이 나은 체험을 의지하지 않고 피 흘리신 주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까지도 주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곧 자신이 포기되어진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항상 회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기도도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이 포기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고 합니다. 여기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신의 더러움을 회개하면서 나를 쳐서라도 돈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그런 기도를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간의 뜻은 철저히 포기되고 주님의 뜻만 고스란히 살아 있는 그 기도는 하늘에서 금 대접에 담긴 향이 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앞에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들고 있습니다. 결국 금 대접에 담긴 기도는 어린양과 함께 죽임을 당한 성도의 기도들인 것입니다. 그 기도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기도란 내 소원을 아뢰는 자리가 아닙니다. 기도란, 내가 과연 탐욕과 내 뜻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3-14)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시행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가 부인되어진 기도는 무엇이든 시행하겠다는 것이지 뭘 구해도 다 시행한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기도를 했느냐 또는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느냐인 것입니다. 인생의 소망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자인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사는 자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물으며 살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진 기도, 이것이 바로 금 대접에 담긴 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가 내 뜻대로가 아닌 주님 뜻대로의 기도가 되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금 대접에 담긴 아름다운 성도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5: 8 성도의 기도)

 

1.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행복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2. 오늘 말씀에서 진정한 신자의 행복은 언제 오며 왜 그렇다고 합니까?

 

3.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4.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성경에서 기도를 말씀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무엇이며 또 그런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7. 시편 66편 말씀에 제사와 기도가 같은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8.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참된 성도의 기도는 어떤 기도여야 합니까?

 

 

9. 신자의 기도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성경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11. 오늘 본문에 하늘의 금대접에 담긴 성도의 기도는 어떤 기도라고 합니까?

 

12.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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