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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림

본문 / 4:10-11

 

1.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오늘날 설교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는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반응에 대하여 무척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설교에 대한 교인들의 시각과 반응을 염려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혹시 교인들이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좋아하는지 또는 싫어하는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눈치를 보면서 설교를 합니다.

결국 그러한 설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복음을 지키고 전달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터 위에 '담임 목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되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를 생각하고, 선지자와 사도들의 마음이 아니라 장사꾼의 마음을 가지고 설교 아닌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반응을 의식하다 보니 의도적으로 교인들과 부딪힐 수 있는 말은 피해버립니다. 특히 교회에서 힘이 있는 사람들, 즉 돈 많은 부자나 장로 그리고 교회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말은 감히 내뱉지를 못합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예를 예라고 할 수 없는 불지 못하는 나팔수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모습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교회를 위해서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위해서 교인들에게 부딪힐 수 있는 말은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로 인해서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럽다면 주님께 영광이 안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목사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용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충돌과 거부반응을 염려해서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삭제를 하고 편집을 해서 거부감이 없는 복음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으로 여기는 목사가 아니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교회를 더 소중히 여기는 거짓 사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주님의 몸을 지킵니다. 즉 인간의 단체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관리하고 확장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면서 자기 백성을 찾는 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있는 곳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될 수밖에 없고,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의 구분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충돌입니다. 목사가 이 충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단의 종으로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에 있어서도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감은 필연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핍박과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과 인간의 만남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현상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달했을 때에도 당시 종교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극렬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세상은 그 어떤 인간도 복음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대적자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반응에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를 과연 성령께서 복음을 위해 세운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이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아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3-5)고 합니다.

여기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제 음성을 낼 때 목자의 양은 목자를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목자가 제 양을 찾기 위해서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목사가 성경을 성경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목사는 목자의 음성을 그대로 내야 합니다. 목사는 목자의 음성을 내는 자로 세움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목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자의 음성을 내어서 목자의 양을 찾기 위한 도구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눈에 보이는 교회에 욕심이 생겨서 내 교회로 만들고 내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목소리를 바꿔 버린다면 그가 바로 절도고 강도고 이리요 삯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에 공통적으로 쓴 말은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성령이 들을 귀를 준 자기 백성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음성은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게 됩니다.

계시록 3장에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면 열어드려야 한다는 인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을 여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자가 일부러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문을 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음성을 듣는 자입니까? 성령이 들을 귀를 준 자기 백성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문을 여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까지 포함된 말씀입니다. 이들이 바로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의 모임이지 아무나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는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음성만 낼 것입니다. 즉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교회는 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말은 할 수 없게 밖에 없습니다. 결국 교인들의 기호에 맞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교인들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이 소망이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이 소망이기 때문에 세상과 등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원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요한이 하늘 보좌를 본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하늘에 앉은 자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이미 본 자로 살게 되면 세상의 실체가 멸망과 저주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미 하늘의 영광을 본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 산다거나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거나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서 뭔가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자이기에 또 다른 무엇을 추가로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얻은 자요 본 자로서 살아가면 그것으로 신자의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2. 24장로

오늘 본문 역시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서 자기가 받은 관을 보좌에 드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서 관은 면류관으로 신자가 하늘에서 받을 상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 보면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4:10 / 개역)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받은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던진다는 표현 때문에 받은 상이 적다거나 불공평해서 기분 나빠 던진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24 장로들은 순교자(설교자에 따라 신약과 구약의 믿는 자를 상징한다고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24장로가 누구냐가 아니기에 그냥 순교자로 이해하고 보도록 하겠습니다)를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받은 면류관을 던지는 것은 면류관을 주신 분에게 도로 반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받은 면류관을 주신 분에게 반납하는 것, 이것이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11)고 합니다. 이것이 반납의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 같은 자가 면류관을 받기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없기에 다시 반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순교자라면 얼마든지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24 장로는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주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주의 뜻대로 만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주의 뜻대로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게 된 것도 다 주인 되신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잔잔한 것도 풍랑이 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열매가 맺히는 것도,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병들고 건강한 것도, 돈을 벌고 돈을 잃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 일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했다면 하나님이 봉사할 수 있는 건강과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결론은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우리가 자랑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는 수고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고하게 된 것이지 내 힘으로 수고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늘 영광을 본 신자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현상입니다.

'내가 봉사한 것은 내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랑 할 수가 없습니다'를 외치며 사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소위 상이라는 것이 허구이며 거짓된 것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하늘에서는 24 장로가 받은 면류관조차 반납을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가 남보다 더 큰상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나선다면 하늘과 정반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요한을 통해 하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은 이러한 하늘의 모습을 땅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24 장로가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일이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반납하고 있다면, 신자 역시 땅에서부터 이미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늘에 가면 면류관을 반납하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부터 그런 모습이 나타나야 그가 바로 천국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상에도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더 큰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면 과연 하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을 세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능력과 결과와 자질과 노력을 기초로 해서 등급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에 의해서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상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따로 구분해 낸다면 그것은 말씀과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은 우리의 열심과 의를 근거로 해서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와 열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열심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열심은 약속이 파기되지 않는 열심입니다. 인간 쪽의 노력과 자질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약속입니다. 즉 약속을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 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자질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천국 가게 되었고,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우리에게 상이 주어지게 되었는데 그 앞에서 큰 상 작은 상을 구분하면서 남보다 더 큰상을 받겠다고 설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은 우리가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린 단지 세상에 내 한 몸 지탱하기 위해서 땀 흘린 것밖에는 없습니다. 내 이름 드러내기 위해서 일했고, 내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한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선이라는 것은 죄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스스로 천국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남보다 잘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 같은 처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다 같은 처지인데 상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 온 자들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지상에서 뭘 얼마나 했든 천국에 온 것이 자기 행위를 발판 삼아서 온 것이 아니라면 천국은 자기 행위가 다 버려진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 미리 알고 살아가는 것이 천국을 드러내는 삶이고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할 때 듣기 거북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소위 봉사 많이 한다고 또 일 많이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 '당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게 한 것인데 뭘 자랑하는가? 자랑할 수도 없고 그것 때문에 더 큰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할 때, 이 말을 '옳다'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그 어느 인간도 자기 행위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기 공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그래 맞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한 것인데 자랑할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의 양입니다. 결국 목사가 말씀을 말씀대로 외칠 때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인들에게 상의 차이를 말하면서, '우리가 한 것만큼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다'고 가르치면 교인들에게는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교회의 성장이나 이익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까? 교회 성장이 예수님의 뜻입니까?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 복음을 얼마든지 편집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장차 하늘에서 면류관을 반납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 반납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이 땅에서부터 자기 열심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가 헛되지 않은 결과로 인정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내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와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것을 삶을 통해 드러내며 살았던 신자일 것입니다.

우린 연약한 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천국 갈 수 없는 무능한 자입니다. 그 연약함과 무능함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이 하신 일인데 어떻게 남보다 더 큰상을 받을 자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 같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아난 처지인데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하늘 백성이 아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강한 것도 주님이 하신 일이고 병든 것도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건강을 줘서 교회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하고 그래서 일을 적게 한 사람보다 상을 더 많이 준다면 결국 예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헌금을 많이 한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이 돈을 주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하늘에 보물을 쌓고 싶어도 쌓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결국 남보다 상을 적게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가 차별되게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지 상에 차이를 두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상은 분명히 있지만 상에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나라가 상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상입니다. 이미 큰 것을 얻었는데 또 다른 것을 추가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는 상이 될만한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조차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은 주인 되신 주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 보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 백성인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열심과 자기 수고와 의와 도덕과 윤리를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설교자들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복음은 무엇으며 또 복음이 전파되면 드러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설교자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교회만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된다고 합니까?

 

6.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 목도하는 하늘에서의 모습은 무엇이며 또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요한의 본 하늘에서의 모습을 우리가 믿는다면 신자인 우리에게 어떤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까?

 

8. 오늘날 우리가 하늘의 모습과 반대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믿는 자라 하면서도 하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0. 신자인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은 무엇이며 또 꼭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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