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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나엘

본문 / 1:43-51

 

1. 만남과 앎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에게 부름을 받은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시비 걸기를 끊이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후에는 더 이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으로 직접 만났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만남은 예수님이 하늘에 가신 이후에도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오직 그분의 말씀 안에서만 참된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분의 메시아 됨을 발견하고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발견하는 것이 곧 참된 만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다만 육신으로만 대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만난 것이지 결코 메시아를 만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 되어지는 것이지 예수님의 육신을 대했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존재하시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씀이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고 그분만이 메시아이심을 능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꿈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꿈에서라도 예수님의 모습을 대하게 되면 뭔가 자신에게 신비한 힘이 주어질 것 같은 착각에서 그러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이 육신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육신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몸을 바라본다고 해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입니까? 예수가 메시아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육신이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말씀에서 예수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그분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분을 육신으로 만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메시아이신 주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다나엘

오늘 본문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빌립은 그리스도를 좇게 되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45절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1:45)고 말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그분이 곧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이, 즉 메시아임을 말합니다. 또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즉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립의 말에 대한 나다나엘은 반응은 어땠습니까? 나다나엘의 반응은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동네였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아주 작은 동네로서 빈곤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즉 천대와 무시를 받는 작은 동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목메어 기다리는 메시아가 그런 동네 출신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의 반응은 일반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출신인 예수에 대해서 빈정대고 경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는 나다나엘에 대해서 빌립은 '와서 보라'(1:46)고 말합니다. 즉 예수의 출신을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와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다만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지 말고 '와서 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의도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대할 수 없는 우리들의 믿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만나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빌립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분이 누군가를 알기를 바랬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간사하다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다나엘의 마음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 이스라엘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분명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출신을 거론하면서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에게서 참 이스라엘이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은 나다나엘 한 개인을 평가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다나엘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으신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이스라엘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다나엘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전혀 없는데도 무턱대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나다나엘에게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 예수를 무시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3. 참 이스라엘

이것은 오늘 본문 48절부터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8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자신을 향해서 참 이스라엘이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1:48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1:48 )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이란 출신 때문에 무시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단지 예수님이 자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위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과는 만난 적도 없는데 빌립이 자신을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부터 이미 보았다는 것에서 나다나엘은 예수가 메시아 되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아시는 것은 다만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알고 있는 차원의 앎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나다나엘은 자신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다나엘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5)고 말씀하자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러한 말을 하자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으로 칭하는 신성모독적인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이러한 생각을 아시고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2:9-10)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이미 아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나다나엘과 서기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다나엘의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 정직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소위 말씀대로 산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어도 종교적인 면에서는 남에게 질 수 없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기에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속셈과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그리고 어떤 간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말하는지, 우리의 실체가 이천여 년 전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을 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거부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들처럼 자신의 의를 스스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훌륭한 신앙적인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앞에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멸망에서 구출될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자신을 아는 말씀 앞에서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나다나엘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예수님은 이 마음을 참 이스라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정직한 간사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모두를 미리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남에게는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속마음까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모두 폭로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지, 우리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면 결국 우리의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서 이미 노출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위선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기쁨으로, 자원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 즉 자기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을 간사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 증거물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과 멸망을 받아야 할 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출할 수 있으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발견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이천 년 전에 남기신 말씀은 우리 속마음까지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오, 나의 주 되심을 고백한다면 그가 바로 참 이스라엘이며 간사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과 자신의 사이에 개입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로 이스라엘이라고 불려진 야곱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고, 힘의 근원이 되는 환도 뼈를 꺾입니다. 그때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향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0-51)고 합니다.

여기 51절의 말씀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경험입니다. 야곱은 거짓으로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났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는 생각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씨름을 한 후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자신이 사는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도 나다나엘이 오직 인자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이스라엘은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자가 없음을 알고 우리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버리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길이 되십니다. 즉 멸망의 자리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생명인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큰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볼 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고백하는 참 이스라엘뿐입니다.

우리의 속까지 아시고 드러내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놀라운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참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 그들이 바로 간사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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