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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언약

본문 /   4:21-31

 

1. 율법 아래의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믿음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체험과 상상에서 나오는 믿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고 체험한 것에다가 성경 구절을 끌어들여서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오직 성경만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전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정성 바쳐  받자고 하는 무속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전체를  언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때에 오직 성경만을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크게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이고, 하나는 신약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약속과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이지만 놀랍게도 이미 구약 안에  언약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때는 아직 신약이 정하여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오직 구약만 있었을 때에 바울은 구약으로  언약을 말하고 있으며,   언약을 아브라함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4:21) 합니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이 복음만으로 기뻐하였는데  뒤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와서는 믿음으로만 부족하고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흔들렸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복음을 들었지만 아직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이전의 행위들이 교회 안에서 나올  있습니다. 이럴 때에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그들 가운데 들어와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  된다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이기에 유대인처럼 할례도 다시 행하여야 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게 들린 것입니다.

여기 율법은 원어로는 '노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 가리키는 단어로 쓰여 졌습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어린 성도,  변절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도적으로 율법주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런 논쟁이  2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로  문제는 복음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만 말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법이 필요하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삶의 규범으로 율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문제로 논쟁을 붙이면 아마도 여러 날을 세워도 토론이 멈추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의 복음에 굳게  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거저   편한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말씀을 통하여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는 이미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하여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율법 아래 들어가는 것이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까? 율법 행위에 속한다는 것은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사람이  아래 갇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가 율법으로 틈을 삼아 우리를  아래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증들을 하면서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아들을 비유로  언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육체와 약속

오늘 본문 22절부터 보면 “22.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4:22-23)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자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종과 자유 하는 여자는 육체와 약속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과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하여 알아야만 합니다.  내용을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처음 듣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에 부르셨을 때에 나이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주도하여 하란까지 옵니다.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나자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결혼은 이미 오래 전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을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땅과 씨를 약속하십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1-3) 합니다.

그런데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겨우 무덤자리 하나만 마련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시행이 되어 완전히 차지하기는 다윗  때까지  1500년이 걸렸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땅에 대한 약속은 결국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땅보다   문제가 바로 씨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기에 자신의 집에서 기른 종이 대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의 몸에서  씨가 너의 후손이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때 사라가 제안을 하기를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얻고  아들을 후손으로 삼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동의하여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에 대하여 창세기 16장에 보면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6:15-16)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교제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세기 17 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의 나이가 86세였는데, 하나님은 13 만에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너는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완전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완전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너의 실력과 솜씨를 발휘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13 동안 교제를 끊고 아브라함의 99 때에 나타나신 것은 아브라함이 전혀 손쓸  없을 때가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는 너와 사라 사이에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생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임을 증거 하는 표가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자체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네 사라가 이미 폐경기에 들어선지 오래된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는데 사라도 장막 뒤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는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  이스마엘이고, 다른  언약은 인간의 능력이  포기되고 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이삭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육체라고 하고, 이삭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육체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만들어   있는 것이 육체입니다. 그리고 약속이란 인간이 만들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것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를 억제한다고 하면서 온갖 기도와 금식과 금욕적인 것으로 육을 이기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육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육체 쫓는 것을 조금도 금할  없습니다.

약속은 이러한 육체가 완전히 포기되는 자리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문명을 보면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지성과 기술로  한명의 생명도 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간의 능력으로 종교적인 솜씨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없는 엄청난 일들을 믿음이라는 말로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습니다. 감히 다른 사람들을   없는 엄청난 종교적인 업적을 만들어 내지만 이런 것은 사람의 수와 사람의 힘으로   있는 것이기에 육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람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싫어서 침을 뱉고 고개를 돌이질 하면서 돌아서는 그런 방법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듯이 인간들이 보기에는 아주 비웃음이 나오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조롱과 경멸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것은 육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부터 보면 “24. 이것은 비유니  여자들은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갈이라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자녀들과 더불어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 어머니라”(4:24-26) 합니다.

하갈과 사라를 가지고 비유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한 비유라고 합니까?  언약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라고 합니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갈이라고 합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때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을 부정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곳이  종이라고 하는  언약입니다.

오직  언약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하여서는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나옵니다. 약속의 자녀를 낳은 어머니는 위에 있다고 합니다. 위에 있다는 말은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아래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도달할  없는 곳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약속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말씀은 지금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며 종과 자유인을 말하면서 종은 율법아래 있는 자이고, 자유자는 은혜아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에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말하며  은혜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3. 오직 은혜만

그리고 27절부터 보면 “27. 기록된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4:27-28) 합니다.  말씀은 이사야 54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54장에 보면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1) 합니다.

 말씀은 파괴된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파괴가 되었으니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과 같은데 이제 회복하여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는 없는데서 있게 되는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바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29절부터 보면 “29. 그러나  때에 육체를 따라  자가 성령을 따라  자를 박해한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4:29-31) 합니다.

여기 보면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 육체를 따라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난 이삭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어 쫓기게 됩니다.

내어 쫓는 이유는 종이 낳은 아들이 유업을 이어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종의 자녀는 유업을 얻지 못하지만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는 유업을 이어받습니다.  유업이란 상속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상속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육체적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약속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를 고집하는 자는 결국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종입니까? 아들입니까?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박하시고 3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언약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말에 거하면 참으로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아노라 그러나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아버지에게서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분뿐이시니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말을 들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31-44)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 하십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종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나를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아비가 마귀인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야만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자리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다른 것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되었기에 결코 사람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2-14) 합니다.

여기 모양을 내다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소페사이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말은 주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자신이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는데, 육체에 좋은 모양을 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단지 자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아는 자들 그리고  가치를 아는 자들은 다른 자랑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행할  있는 모든 세상적인 업적이나 종교적인 것들이 자랑으로 나오는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지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자녀라면 그리고 그것이 오직 십자가에  박히신 주의 은혜라고 알고 믿는다면 우리에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위에서  자의 모습이며, 신앙이며, 고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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