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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죽음을 맛보려 하심

본문 / 2: 5-10

 

1. 세상과 믿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 늘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한번 보란 듯이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의 능력이 나타나서 지금 나의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깔보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힘이 되지 못하다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을 대단하게 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돈이 있는 자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지만 믿음이 있는 신자 앞에서는 오히려 조롱할 뿐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신앙을 맥 빠지게 하고 힘없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주의 은혜와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은혜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이 있나?’라는 불신을 가득 안고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그 속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히브리서에서는 천사도 신자의 섬김을 위해 보냄 받은 존재로 말할 정도로 신자의 존귀함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자라는 신분이 존귀하다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느낌도 갖고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의 존귀함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존귀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식으로 대하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아무리 성경이 신자를 존귀한 존재로 말한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전혀 달라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말씀에 히브리서 기자는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여 더욱 간절히 삼가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존재하게 되는가에 대해 말함으로써 신자의 마음을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처음 받는 수신자들도 고난 중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기적을 일으켜 주었듯이 자기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능력을 발휘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과 죽으심보다 다른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초반부에는 천사들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완전하고 뛰어나신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데 그 현실은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인해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그들의 신앙이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여 권면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은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잘못된 기대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고 또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분이라면 이 세상에서 모든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21:16)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에서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8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을 보면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8:1-9)라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쓴 것입니다. 이 말씀 중에 5절과 6절은 오늘 히브리서 본문 6절과 7절에서 인용한 말씀이고 또 시편 82절은 마태복음 2116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이 시편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으로 해석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의 배경처럼 예수님이 성전에 입성하실 때에 왕처럼 백마를 타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환호하며 겉옷을 길에 깔고 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이들이 이처럼 환호하는 것은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가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영광의 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영광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은 그들이 꿈꾸는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죽으심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이 정도라면 그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현실적인 왕으로서의 등극하기를 바라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십니다. 이때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르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아이들의 소리를 듣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편 8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는 길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로 하여금 원수를 대적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권세를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천사들을 동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으로 온전케 되시는 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세상은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세상은 전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악한 죄인으로 여기며 죽여 버린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도 이러하다면 우리의 현실이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말해 봐야 우리가 전하는 예수로 인하여 대접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만약 세상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으로 인해 대접받는 존재가 되어지기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조차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발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대접받는 존재가 되어지기를 열망합니다. 즉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복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성공한 자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 위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3. 잠시 동안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세상에서 그러한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9-10)고 합니다.

여기 천사들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모든 것이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처럼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을 입어야 하셨던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저희의 구원의 주를 온전케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홀로 하늘로 가실 것 같으면 고난이 필요 없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경하시고 그냥 가실 것 같으면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죽음은 예수님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오직 죄를 범한 인간의 몫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몫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자기 아들을 만들어 내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인간의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도 함께 드러내시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의 십자가를 모르면 죄도 모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공의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유일한 길은 즉, 원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유일한 길은 그 아들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피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인간의 죄를 보기보다는 죽음을 곧 불행으로만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단지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죄를 아는 것에서 흘러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애당초 나의 몫이었음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큰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7:41-43)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식사하실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들어 와서는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게 됩니다.

이를 본 청한 바리새인이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하자 그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 비유로서 물으시고 바리새인이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에서 탕감한 자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탕감받은 자는 죄인 된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죄를 탕감하는 데는 누구는 많이 또는 누구는 적게 라는 게 없습니다. 다 똑같이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탕감의 많고 적음의 이야기는 실제로 탕감을 더 많이 또는 적게 해 줬다는 의미가 아니라 탕감받은 자신의 실체를 너무 잘 알아 너무나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의 죄수라고 여기는 자는 자신이 받은바 용서와 사랑이 크고 존귀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그 차이가 진정한 감사에 대한 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은혜에 대한 깨달음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신데 그런 분이 오셔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 뜻에 순종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이 믿는 자들을 세상에서 대접받고 높임 받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섬김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지금의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힘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 대해 무관심하고 시큰둥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사명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4. 영원을 소망하며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을 불행하다 여기는 것은 소유의식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팔팔하게 힘이 넘치는데 그에 비해 내가 가져지는 것이 없으니 그러한 불만족에서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신앙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무엇을 갖고자 하십니까?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또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시며 살고 있습니까? 풍족한 삶입니까? 성공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는 존재로 뒤바뀌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바람이 있다면 그런 우리는 백이면 백 믿음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만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그 어떤 매력도 갖지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잠시 잠깐동안 존재하다 사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즐거움조차 말 그대로 잠시동안일 뿐입니다. 반대로 고난과 어려움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인해서 대접받는 것이 없고 오히려 조롱받음만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잠시동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그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이 영원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셨으나 오늘 본문에 보면 잠시동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그런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자리에서 고난을 맛보고 또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대접받으며 산다 할지라도 잠시동안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잠시 세상에 버려둔 것처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잠시동안 죽음을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그런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모두에게 닻이 되어서 우리 모두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의 현실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의심이 있다면 잠시 죽음을 맛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또 무엇 때문에 죽음을 맛보아야 하셨는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맛보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묵상의 끝에서 사랑의 하나님,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보다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생도 잠깐이고 행복도 잠깐일 뿐입니다. 잠깐으로 끝날 인생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세월을 허비하기보다는 영원히 주어질 복된 것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사는 것이 더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죽음을 맛보신 예수님 앞에서 깊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심으로 크고 복된 것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에게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에서 흔들리고 낙심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시는 분이야 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가슴 깊이 새기고 깨달아 살아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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