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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이 주신 믿음의 감사

본문 / 14: 7-10

 

1. 알지 못하던 때

오늘이 감사주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추수감사주일의 설교내용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서 그 험악한 환경에서도 제일 먼저 예배당을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 자기들의 집을 지었으며 또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첫 가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세계에서 일등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그러니 우리도 어렵지만 감사를 하면 하나님이 더 감사할 것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자나라 강한 나라가 되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입장에서 전하여 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은 것이고 우리가 가난한 나라였기에 그러한 내용들이 실감 나게 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그런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독교가 그동안 저질러온 수많은 범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청교도들의 죄악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 온 청교도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힘이 약하였기에 오히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곡식 종자를 받기도 하고 또 그들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힘이 약할 때뿐이고, 자신들의 힘이 다소 강하여지자 그들은 원주민들보다 앞선 무기들을 들고 와서 원주민들을 물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소수는 원주민을 보호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인디언들의 토지 개념은 어떤 개인의 땅이 아니라 만민의 소유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은 자연 친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토지 개념은 모두 다 개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원주민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당시 청교도들은 전 세계의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 여겼습니다. 땅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 경작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으니 그 땅을 경작하고 개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땅을 먼저 발견한 자의 것이고 그 땅의 주인은 그 땅에 자리를 잡고 경작할 권리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인 원주민들은 영혼이 없는 마귀의 앞잡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민의 번영을 위해서는 원주민을 추방하고 원주민들의 땅을 소유하는 행위는 정의로운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지닌 힘이 약한 청교도들이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살아갔지만 그들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1637년 민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민을 습격하고 600여 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 서인도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오늘 600여 명의 이교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계속된 이들의 영토침략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륙을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만스러운 광경을 바라본 원주민들이 치를 떨며, 우리들이 믿는 신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가르치는데 당신들이 믿는 신은 왜 남을 죽이고 빼앗으라고 가르치느냐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차지한 땅이 북아메리카와 캐나다이며 그리고 황금을 발견한다고 서부로 옮겨 개척을 해 나가면서 결국 그 땅의 원주인인 인디언들을 몰살하고 지금도 원주민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이라고 곳에서 아주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물론 구약의 여호수아서를 보면 정복 전쟁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죄악이 관영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면서 세상의 죄악을 어떻게 징벌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문자대로 자기들에게 적용하여 그대로 시행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운 죄악인 것입니다. 러므로 이제 우리의 추수 감사의 의미가 그런 미국적인 감사를 버리고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도 추수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조상들이 가을 추수를 하고서 감사를 한 것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알지 못하고 행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2. 알지 못하는 신과 참 하나님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22-31)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때의 내용입니다. 아덴은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이곳의 공개 토론장이 아레오바고인데 바울이 아테네를 돌아보니 온갖 우상을 섬기던 신전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이 전도를 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신들을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것도 보았다. 신들이 너무 많다 보니 그중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신이 있다면 그런 신에게도 제사를 지내겠다고 할 정도로 얼마나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런 그들에게 참된 신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 내용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첫째가 24절에 있는 창조주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분이시기에 천지의 주재이시며, 주인이요 왕이십니다. 둘째가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그분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런 바울의 선포는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가 들을 때에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분이 어떻게 사람의 섬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바울이 에덴 사람들에게 전도한 하나님을 보며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과연 이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을 때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합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4-15)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24:16-18)라고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수아처럼 그렇게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24:19-20)고 합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너희 말대로 여호아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제대로 섬길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생각을 바꿔야만 합니다. 우리 생각처럼 우리가 잘 섬기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지셔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구 주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말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우리도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도 사실 에덴 사람들과 같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에덴 사람들처럼 범사에 종교성이 많습니다. 절하지 않고 빌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나무든 돌이든 정성을 다하여 빌기만 하면 복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성이 부족하여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성을 목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흔한 말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그런 말씀이 성경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한다면서 바치면 복 받는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하여 정성을 바치고 힘에 지나치도록 헌신 충성 봉사를 하였는데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면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정성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자기를 탓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종교성에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들어가면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랍니다. 이런 말씀이 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종교성이 가득하여서 바쳐야 복을 받지 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바쳐서 복을 받았다는 말만 하게 되면 그런 이야기는 정말 잘 들리는 것입니다. 행한 것이 없이 받는 은혜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1725절을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5)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김을 받아서 그 받은 섬김이 조건이 되어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노아와의 언약을 따라서 이 땅이 있을 동안에 심음과 거둠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의 풍성하심이 의인에게만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어도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가을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여름의 무더운 날씨가 시원해지도록 그리하여 결실이 되도록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매일 보는 햇볕에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거저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5-36)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이 기뻐하셔서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성경에 하나님께 바치면 복을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도 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 중 누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행하다가도 하나만 못 지키게 되면 모두가 범한 것이 됩니다. 십일조 하나만 온전히 드리면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도 이스라엘의 받은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것은 다 못하여도 십일조, 주일 성수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오직 흠 없는 어린양으로 드려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단지 한해 농사 잘된 것으로 또 한 해의 일이 잘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지 않아도 어려워도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다시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0-31)고 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는 허물치 않았습니다. 추수 감사제를 조상에게 하든지 다른 신에게 하든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 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천하를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이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단지 농사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안 되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알게 하셨고 또 믿을 수 있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입니다. 단지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한 우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의 수많은 신전과 신들을 보면서 그러한 신들을 사람들이 섬긴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 많은 신들은 사람들이 잘 섬겨 주어야만 되는 신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많은 종교성으로도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직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계시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야만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며 지금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3. 하나님 보기

그러면 어떤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1-25)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제사를 기뻐하셨는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제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계시가 담겨진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감사는 단지 추수하는 감사만이 아니라 이러한 추수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긍휼의 풍성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소원하는 감사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면 히브리서 1025절의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10:25 / 공동번역)라는 말씀처럼 더욱 더 모이는 삶에 분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빌립이 보여 주소서 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한 것은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눈에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더욱 더 볼 수 있는 믿음의 시각으로 살아가시면서 더욱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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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9월 20일 / 갈라디아서 22. (갈 5:25-26)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마라 관리자 2020.09.20 202
515 9월 13일 / 갈라디아서 21. (갈5:19-26)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관리자 2020.09.13 156
514 9월 6일 / 갈라디아서 20. (갈 5:16-18) 성령을 따라 행하라 관리자 2020.09.06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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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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