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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멸망할 것과 영존할 것

본문 / 1:10-14

 

1. 시각

마태복음 6장에 보면 “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6:21-23)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눈이란 단지 시각적인 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본들 세상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겉모습만을 본다면 그것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소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은 세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본질과 이치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보물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39-41)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게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해서 다시 보게 된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은 2절에부터 보면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2-3)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 말씀처럼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죽은 자가 되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시체와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그들의 눈을 열고, 귀를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듣게 하십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 말은 그들은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는 하나 실상은 죽은 자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경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인들은 본다고 하니 구원받지 못한 자이기에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라오디게아 교회, 즉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자신들은 구원 받아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곤고한 자들이며, 가난한 자들이며, 눈 멀고 벌거벗은 자들일 뿐입니다. 여기서도 눈 멀었다는 표현은 육체적은 눈 멈이 아니라 마치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교회를 향한 표현인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하는 교회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앞에서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도 소경된 자들, 즉 눈이 성하지 못한 자들은 세상을 겉만 보고 사는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있어 보물은 오직 세상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오직 거기에다 두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보물은 분명 다른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갈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무시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장 귀한 보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라고 합니다. 여기 감추어졌다고 표현은 하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땅속 깊이 파묻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에 이 밭의 보물을 발견하여 이 밭을 산 자가 땅을 파서 발견을 한 것이라면 땅을 팔 때 밭 주인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밭의 보물은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 보물이 아니라 다 드러나 있는데 그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밭을 지나가도 그 보물의 가치를 알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의 가치를 발견한 자가 그 밭을 사기 위해 자기 소유를 판 것입니다. 결국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 보물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시각과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도 이 보물의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다면 앞에서 읽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눈 먼자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리들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1:10-12)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상을 멸망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세상을 멸망할 존재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웃으며 콧방귀를 낍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얼마든지 지탱 가능하며 또 잘 굴러가고 있는 자신들의 공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발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보이는 것들이 성경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멸망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멸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있는 것을 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자일 뿐인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오직 소망을 방주에 두었던 것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일이 그에게는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보지 못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그토록 큰 배를 만드는 노아가 어리석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홍수 심판을 믿은 노아에게는 방주가 생명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심판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쳐지지도 않고 변화될 수도 없는 것이 세상이기에 필히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또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2. 원수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1:13)라고 말씀합니다. 네 원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원수를 의미하며 그것은 또 세상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해, , 별 등의 모든 것도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원수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대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원수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이 거부한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죄인으로 여기는 예수님에 대해 반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 역시 그리스도의 의로 주어지는 것일 뿐 너희들의 힘으로는 결코 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끝까지 자기들의 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이며 그 배후에는 사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만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 거기에는 지금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상태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시고 이미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에덴의 땅에서 땀을 흘리며 무엇을 심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가 에덴에 왔을 때는 이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담이 살아가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다 해 주신 것입니다. 아담은 그곳에서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면 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길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전락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그리스도의 원수이며 하나님은 원수를 멸망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멸망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시각으로 사는 것 자체가 복을 누리며 사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구원 얻을 후사입니다. 구원 얻을 후사를 섬기라고 천사를 보내실 정도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존귀한 존재가 과연 구원 얻을 후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구원 얻은 후사로 산다면 세상이 살아가는 질서에 순응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질서는 오직 힘의 논리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인 것입니다.

사단은 이 질서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의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입니다. 떡을 위하고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떡이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세상의 고민이며 삶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을 후사는 떡의 문제는 하나님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 천국의 질서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은 여전히 세상의 질서에 동행하면서 눈물만 흘린다고 해서 구원 얻은 후사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멸망하지만 오직 주는 영존하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존하시는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고 사라진 가운데 오직 영원히 해처럼 빛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곧 멸망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자신을 감사고 치장을 했다 하더라도 멸망의 자식으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연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체이니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기 바랍니다.

 

3. 구원 이후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한 채 세상을 바라보면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처럼 돈을 위하고, 출세를 위하고,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에 더 마음이 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암초를 향해 가는 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잠시 후면 깨어지고 파선할 배 위에서 파티하고 쾌락을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부럽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앞에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 진리가 밥 먹여 주나 어쨌든 돈이 있어야 살지라며 진리보다 현실에 굴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면서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 열려야만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6-18)고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멸망할 것과 영존할 것을 보는 자로 살아갑니다. 창세기 1장에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1:3-5)고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고 하며, 이어서 6절에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성취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빛과 어둠이 분리되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분리되듯이 무엇이 빛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땅에 속한 것인가가 분리되게 됩니다. 무엇이 하늘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땅에 속한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후사, 즉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리석음이 무엇이며 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멸망과 영존이라는 갈림길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가 바로 복 있는 신자임을 알아 이미도 받은 그 복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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