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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본문 / 6:11-16

 

1. 교회의 타락

종교개혁자인 칼뱅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보면 우리가 오늘날 양식(良識)이 있는 사람 백 명을 면담해 보면 그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을 하려는 사람 한 명을 찾기가 힘들다고 하는 글이 있습니다. 칼뱅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은 아마도 본인이 가톨릭의 잘못된 것을 개혁한 사람이기에 하는 말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인 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성경에서 이미 결정 난 사항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1-5)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한 곳에 내려와서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이방인이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의 결론을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10절부터 보면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5:10-11)고 합니다. 베드로의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믿지 못한 사실이지만 그가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결과를 자신이 보았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에 이어서 야고보도 분명히 확정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월이 지나면서 핍박받던 기독교가 세상의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기독교로 로마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오직 은혜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면 사람들의 헌신과 열심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어져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든지 말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약속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추가시키는 것은 교회가 힘을 원한 까닭입니다. 그 결과 캄캄한 흑암의 역사가 천년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내용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 교회가 그런 자들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오늘 이 땅의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오직 은혜로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도 복을 받고 더 나아가서는 죽어서도 천국 가서 더 많은 상을 받으려면 그것은 나의 행함과 비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이 타락하여 간 모습이 지금 이 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 은혜로 그리고 오직 주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은 자라고 고백하고 믿는 자라면 우리가 사는 이러한 믿음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자랑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11)고 합니다. 바울이 구술하고 바울의 제자가 받아씁니다. 바울의 시력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이 당시에는 그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받아쓰게 하고 다시 읽어보게 하고서 끝에 자신의 편지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친필로 마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가 바울의 서신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부터 보면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6:12-13)고 합니다.

할례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모양을 낸다는 것은 자신들의 전한 결과를 숫자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몇 사람이 받게 하였는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이 전도하였는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들도 사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도 할례는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에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6:15)고 합니다.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비교하면서 말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로 말하면 나의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많은가 적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비교 평가하지만 새로 지으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보이는 것으로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4-17)라고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고 합니다. 사람들이 육체의 모양을 내고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외에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성경 66권도 전부 십자가만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바울사도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는지 우리는 항변하고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런 반발이 나온다면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고,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까? 이 본문을 공동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6:14 / 공동새번역)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이 말씀이 확인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때에 과연 죽은 세상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아직 살만한 세상으로 보이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에 죽은 자로 봅니까? 아니면 산자로 봅니까? 아직 펄펄 살아서 악착같이 썩어질 세상의 것들을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3. 어리석은 인간

요즘은 예수를 믿는 많은 분들이 세상의 정치 싸움에 빠져 좌우 논리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무엇 하나 하려고 하면 반대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격한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문제에 있어 언제나 국론이 찬반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찬반의 논리에 한쪽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또 다른 편에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마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자기의 가치관과 자신의 이해에 따라 편이 갈라집니다. 정부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있고 반대로 그런 일을 하면 주께서 심판한다고 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 것입니까?

예전에 부교역자와 교회 직원들이 많은 어느 교회가 노회의 가입문제로 갈등이 있었을 때에 그 교회 어느 장로님께서 대표기도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만 세 번 하고 기도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동의회에서 노회 가입이 통과되자 화를 내면서 결국 교회를 옮겼다고 합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는 기도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천지 창조도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내 뜻대로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세상 전체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정치적으로는 좌우로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들 편에서는 자신들의 뜻이 주의 뜻이라고 여기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들 모두를 다 틀렸다고 하시면서 하늘로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지구를 멸할 폭탄을 어느 분이 몰고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 당시처럼 서로 원수처럼 싸우던 사람들도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똘똘 뭉쳐 반대하고 싸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는 많이 있었습니다. 딥 임펙트, 아마겟돈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한가지로 말하는 것은 지구라는 곳에서 국가 간에 국지전을 할지라도 외계에서 행성이나 외계인이 나타나서 지구를 멸하려고 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물리치고 지구여 영원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모든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한마음 한뜻이 됩니다.

이런 세상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였는지 어제의 적이었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합동으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10-12)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로마의 정치꾼인 헤롯과 빌라도마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됩니다. 두 사람이 친하게 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공동의 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공동의 적, 공공의 적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죽여 버린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를 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도행전 4장에 보면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4:26-28)라고 합니다.

여기에 동의하고 함께한 자들이 바로 오늘 우리 모두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손해가 와도 온갖 불평과 원망이 쏟아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기에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6:16)라고 합니다. 이 규례를 행한다고 할 때에 규례가 헬라어로는 카논입니다. 카논은 척도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척도는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복음의 척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환경과 형편을 넘어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과 긍휼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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