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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의 위대함

본문 / 1: 1- 3

 

1. 히브리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과 모여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퍼즐 그림을 헤쳐 놓고서 그 한 조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만을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는 언제나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확신들이 말씀 앞에 고발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오늘부터 히브리서를 대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와 수신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배경하에서 기록되었는가는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유대교에 익숙한 자들이 개종을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처에 퍼져있는 유대교의 핍박이 만만치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 가장 핍박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들에 대한 핍박을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서, 핍박하는 자들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들은 늘 승리하게 되면 견디기 쉬울 것인데 예수를 믿어도 별다른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믿으며 핍박받는 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위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쓰여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때 그 시절의 말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절실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갈라디아의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의 진리 속에서 자유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할례도 행하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고 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서를 보는 성도들도 다시 율법적인 유대교, 즉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왜 또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기 행위가 없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데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고 말씀하는 복음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행위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은 그것을 안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것은 믿는 자가 자기의 증거물로 가지기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눈에 증거로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의 증거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으로는 애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자기의 몸에 분명한 표식이 있으니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합니까? 그리고 안식일 지킴도 얼마나 분명합니까? 그런데 예수님만 믿는 것으로 부족하고 허전한 것처럼 여겼는데 그런 자들에게 할례나 안식일 지킴을 자신들의 믿음의 행위로 간주하게 만들어주니 그런 말에 얼마나 귀가 솔깃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넘어갑니다.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고 하며 다른 것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안식교는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 중에도 안식일을 지킴으로 얼마나 자기들의 정체성 확인에 분명하고 좋은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집총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군에 징집되어도 집총을 거부하여 전과자가 되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열심과 확신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모두가 예수님만으로 무언가 허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행함의 교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에 대한 복음의 설교가 아니라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인 증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인간들의 행함만이 가득한 교회가 되어버렸다면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만든 종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 볼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모든 구약의 내용들의 완성이 되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모형이고 그림자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에서의 짐승의 피도 결국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연약함을 가진 제사장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벽하게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예언의 정점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종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인 것입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서도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으니 염려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만 계신다면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시기에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그것이 완전한 교회인 것입니다. 목사가 없어도 장로가 없어도 됩니다. 찬양대가 없어도 건물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모여진 사람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오늘 말씀에서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시각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이 믿음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 있는 자를 세상은 인정치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고 또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힘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기에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각기 다른 문을 왕래하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있는 것이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로 행세하려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고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는 것이 믿음이기에 고의적으로 믿음을 감추거나 아니면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믿음의 문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구분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든 세상에서든 믿음은 믿음의 모습 그대로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믿음이 있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신자 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또 알아주지 않던, 힘이 되던 아니면 힘이 되지 못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말고 묵묵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주변 분위기에 민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가 분위기든 사람이든 신경 쓰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보면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1-2)고 합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 만유의 중심에 계시고 구약의 모든 것까지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씀한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완벽하게 주어졌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등장을 시킨다거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단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시다면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자기 경험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멋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도자시며 빛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 인도하실 유일한 분이시며 어둠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주실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러한 분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앞서 말한 대로 자기 경험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들었다가 기도해서 나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자기 경험에서 하나님은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분으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단지 성경에 있는 내용으로 여겨버릴 뿐 관심은 다른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산다 할지라도 병든 몸 하나 고침 받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구약에 여러 부분들, 즉 기적과 제사와 절기 등의 모든 것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 마지막 날에는 아들로써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 보면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구약의 기적과 제사와 절기 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구약의 절기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이해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약에는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에서는 아들로써 계시하셨다면 구약의 여러 부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여러 부분들과 모양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히브리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약의 여러 부분과 모양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에서도 구약의 여러 부분들과 모양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히브리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을 보기를 싫어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만 합니다. 믿음의 본질을 예수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에 두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

오늘 본문 2절 마지막에 보면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고 말씀하고 또 3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외에 그 무엇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써 영광을 돌려보겠다는 것은 헛된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3절에 보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합니다. 모든 만물들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능력과 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되어지는 것뿐인데 어떻게 인간을 독려하고 힘을 내게 해서 뜻하는 일을 이루어 보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예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되어지든 또는 되어지지 않던 그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며 주님의 뜻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되어지면 그 되어진 일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또 안되면 그 안 되어진 일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자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하시고 세상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세상은 알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연히 믿음의 위대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믿음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또한 돈과 권력을 힘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믿음 역시 힘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믿음을 조롱하는 것으로 세상은 이미 심판의 대상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능력의 말씀에 붙들려 있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분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이 놀라운 일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그야 말로 나약한 신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만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혀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불평과 불만을 쏟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위대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약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기보다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 내세의 문제에 염두를 두지 않기 때문에 불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만물을 붙드시는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고 계십니다. 그런 우리가 나약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내세를 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 충분함을 알게 되고 또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 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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