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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 / 3:11-16 

 

1. 하나님의 의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서적들을 접합니다. 그 많은 책들에는 저자가 있고 그리고 그 책의 내용에는 그 책을 쓴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쓴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따라 읽고 그 책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른 독서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이든 그 책을 쓴 저자가 있고 그리고 그 저자는 책을 읽을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과 바람을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여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경에도 저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벗어나지 않고서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기록하셨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 역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충실해야지 기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욕구를 가지고 대한다면 단지 신비롭게 보이는 기적에 매달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사실 성경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통해 일하셨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은 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기적에 대해 신비성과 초월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즉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일 때 그것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런 기적의 신비하고 초월적인 모습에 매료 되어 버립니다. 결국 기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가려진 채 다만 기적 그 자체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적만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들은 단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계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단지 우리에게 초월성과 신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면 다른 종교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기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가 더 센 신비와 초월을 보여주느냐로 우월을 판가름하는 분위기가 우리 가운데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서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이 있다고 할 때 무턱대고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의 기적을 인정한다는 것이 마치 다른 종교가 내가 믿는 기독교보다 더 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초월적인 기적의 사건들이 기록된 것은 절대로 종교적인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기적을 종교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는 도구로 생각하고 취급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기적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도의 관심

오늘 본문은 기적의 사건 후에 있게 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즉 기적을 목격했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을 말하면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분명 신비스러운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그러한 일을 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라는 말을 하면서,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고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사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이것은 사도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난 믿음이 이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위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인 도구들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이 있어서 이적적 인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그래서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여 모든 존경과 영광을 다 받으며 기적으로 인해 모든 군중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이용하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명으로서 한 때는 누가 서로 크냐고 다투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면 누가 크냐로 다투던 베드로라면 당연히 자기의 경건과 권능인 것처럼 말하여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이 일을 행한 것처럼 여기며 주목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의 베드로와 지금의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관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그로 인해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이들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데에만 집중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절에서 사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3:13)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출애굽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표현으로서 베드로가 이 표현을 사용하는 의도는 지금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확인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바탕 위에서 구약의 완성 자이신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삼일 만에 부활시키고 승천케 하셔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히기 까기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끄집어내게 된 말은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등장하는 앉은뱅이를 단지 병자라는 차원에서 보지 말고 그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의 실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앉은뱅이가 지금 일어났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14절부터 보면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3:14)말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주장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일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회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서 그분이 바로 생명의 주였음을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은 단순히 신비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고 돌이키고 말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주장하시는 일임을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로 나서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결과가 될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심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겠습니까? 우리도 어쩌면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대견한 생각을 잊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은 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 앉은뱅이를 일으킨 놀라운 일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신을 위대한 능력자로 내세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지키겠다는 고백과 다짐 앞에 무너진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3-35)고 합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제자들로 하여금 지금의 이러한 일들은 자기 능력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하게 할 수 없음을 경험한 제자들이기에 지금의 이 능력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되심을 계시하기 위한 능력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시는 분이었음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어떤 일에서든 사람이 주체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간증이라는 것의 오류도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간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간증에서 인간이 그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간증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한 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많이 들을 수 있는 간증 중에 죽을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체험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도를 어떻게 했다거나, 금식을 했다는 등의 자기 노력이 개입을 합니다. 그리고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모든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의 주장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 자체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체험도 인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보더라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길을 돌이킨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뜬 체험도 했고, 죽은 자를 살린 체험도 했고, 독사에 물렸는데 죽지 않은 체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삼층 천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체험으로 따지자면 바울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쓴 서신서를 대할 때 바울은 모든 성경을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쓰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 체험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체험을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서 자기 체험을 언급하는 차원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체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인간의 체험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처럼 나도 저런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누가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도 담담할 수 있어야 하고, 설령 내 자신이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그 체험에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힘이 될 수도 있고 감정적인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자기 체험을 믿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체험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수준 낮은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은 그러한 체험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런 일이 있게 하셨다'는 생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일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일의 증거일 뿐이다'는 생각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체험을 바르게 가진 자의 신앙이며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의 자리에 있다면 어떤 일도 내가 아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에게 주신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시각이 우리 주로 말미암아 예원 모든 가족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모든 삶에서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예원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할 때 바른 태도는 무엇이며,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기적을 바라보는 인간적인 시각과 성경적인 시각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성령 받기 전과 받은 후의 베드로가 어떻게 가르며 또 기적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베드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

6. 주님의 제자들이 주 안에서 능력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7. 인간들의 잘못 된 간증에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며, 성경의 간증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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