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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의 이름에 대한 열방의 분노

본문 / 4:23-31

 

 

1. 신자의 기도

지난주에는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제 나의 이름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에 대하여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는 반면에 실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삶이 신자의 고백이며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잡혀 갇힌 사도들이 예수의 도를 전하지 말라는 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만 들을 뿐이라는 단호함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을 죽이고 싶은 것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마음이었으나 사도들이 행한 일을 보고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로 인하여 할 수 없이 풀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풀려난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 동료들에게 제사장과 장로들이 한 말을 얘기하게 되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기도에서 30절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30)라는 기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 나음과 어떤 능력적인 표적을 원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절로 오해되기 쉬운 내용입니다. 주의 사도들도 그러한 기도를 했으니 우리도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를 깊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러한 의미로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24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4:24)라는 기도를 보면 단지 이런 표현은 하나님을 높여 부르기 위한 의례적인 표현법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에서 고쳐져야 할 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 하나님 등의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런 표현들이 단지 기도를 위한 의례적인 표현으로 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를 기도답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미사어구 정도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복종하고자 하는 뜻도 없으면서 그저 기도를 하기 위해 사용되고 동원되는 표현으로만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이기만을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말하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재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오직 복종할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는 오직 복종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진행해 가시든 피조물인 우리는 복종하는 것만이 대주재이시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신자로서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에게 있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하심

그런데 우리는 사도들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30)라는 기도를 자신의 병 나음과 어떤 능력적인 표적을 원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절로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여 큰 업적을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자기의 이름을 포기하지 못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예수의 이름은 마치 두드리면 이루어지는 것 같은 도깨비 방망이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기적 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도 하나님이 그런 기적 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훨씬 많아 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들로 하여금 갇히고 매 맞고 순교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지만 또 그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어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 주의 십자가는 미련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엘리야의 경우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하면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이 갈멜산의 기도일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향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3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가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지를 제단에 제물을 놓고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면 그 신이 참신이라고 하자고 하는 제안을 합니다. 그 대결에서 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다 살라 버림으로 승리하게 되고, 그 승리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불로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저 악한 아합과 이세벨이 사는 왕궁도 불 태워 무너뜨릴 것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이세벨이 자기의 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던 엘리야가 도망을 가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고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두 번째는 지진이, 세 번째는 불이었는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음성이 임하여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는데 다른 선지자는 다 죽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너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을 남겨 놓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크고 강한 바람처럼 다 둘러 엎어버리기를 원합니다. 또는 지진이 나서 다 흔들어 버리시거나 아니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지 않고 조용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아합의 궁궐이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세상은 여전히 튼튼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방금 엄청난 기적을 보았고 자기의 손을 통해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거대한 세력으로 남아 있고 오히려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정도 됐으면 우리의 기대는 더욱 더 커 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기적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들 편에 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핍박하지 않고 자신들을 잘 대해 줄 것이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우러러 볼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젠 남은 것은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되어지는 모든 역사는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나쁜 일인 경우 그런 고백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 보기에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아무리 육신에 유익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 이상 결코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 대한 분별이 우리의 영의 문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도 핍박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관원들도 분명한 증거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복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위협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적조차 없애버리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자 나사로를 죽여 버리려고 하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기에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고 대답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들은 위협하고 협박하면서 예수의 이름만은 증거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이 싸움이며, 오늘도 이 전쟁은 소리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허용하지만 예수의 이름만은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열방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

왜 그런 것인가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증거를 보면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4:23-28)고 합니다. 사도들이 동료들에게 가서 그동안의 일을 말하며 이렇게 된 것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2편을 인용하며 온 세상이 분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왕들과 관리들이 한가지로 분노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한 분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정말 악한 일을 보면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편 2편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다 하나로 마음을 합하여 분노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단체가 있지만 그들은 전부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합집산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모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있는 세상이 갑자가 한 마음이 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합동으로 분노하면서 한가지의 일을 이루어 내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온 열방이 분노하는 이유 한 가지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기 위해 온 세상이 언제나 하나로 합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기 위해 헤롯과 빌라도가 동원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동원되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뭉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일삼던 자들이 합동으로 뭉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예수의 이름이 들리면 우리는 분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을 동 살 동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데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함께 죽자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오는 예수가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향해 분노하고 돌을 던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 정말 은혜롭다하며 앉아있다면 대단히 믿음이 좋거나 아니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제대로 들으면 뛰쳐나가고 싶어야 당연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데 성경은 다르게 말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숙달이 되는지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여도 아주 여유 있게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인간이 별수 있겠어! 다 죄인이니 그렇지!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 아니겠어!’ 하면서 아무리 충격적인 말씀이 증거 되어도 튼튼하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예수의 이름을 듣고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너무나 친근하고 부드럽고 호의적인 예수의 이름을 듣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은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게 사니 이제부터는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다른 사람보다 능력 있게 살라고 합니다.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널리 유포되었는지 다이어트 광고에 '네 시작은 뚱뚱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날씬하리라'는 문구가 등장할 정도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예수, 나의 가정과 사업을 지켜주고 번창시켜주는 예수, 우리 교회를 잘되게 하여주는 예수 그런 호의적인 예수의 이름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라면 열방이 왜 분노 하겠습니까? 도리어 환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는 분명히 열방이 분노하는 예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를 제자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합동으로 결정한 일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더 나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3-6)고 합니다. 이제 주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노한 열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열방이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여 버린 일에 합동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일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날마다 회개하는 자입니다. 주여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저 주와 함께 죽었음을 매일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갑니까? 이렇게 믿어 드렸으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된다면 항상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이 선포됨에도 우리는 분노하는 자들이 아니라 감사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들 그렇게 살아도 우린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노래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예원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기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우리와 사도의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2. 도를 병 나음과 능력적인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엘리야의 갈멜산에서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성경적 현실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우리는 왜 나의 원함을 따라 일이 되어질 때만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5. 오늘날 우리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 소리 없는 전쟁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에 열방들이 분노하는 까닭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 열방처럼 분노하지 않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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