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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람들에 의해 버려진 모퉁이 돌

본문 / 4: 5-12  

 

 

1. 십자가의 도의 모습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고 또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시작이 이렇다면 갈수록 이러한 능력들이 점점 증폭되어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항복하고 기적이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돌아온 것은 붙잡힘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붙잡힌 사도들을 재판하는 자들의 심문과 사도들의 대답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에서 분명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또 그 권세로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제자들을 세상의 권세가 어떻게 할 수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죽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씩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과는 흐지부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보면 별 볼일 없이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완전한 구원이 못된다고 주장하며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통일교와 같은 집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죽게 됨으로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내용이 통일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 대신 나의 손과 발을 드리자,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믿는 자들이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의 권력에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죽기까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18-25)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세상의 지혜란 커다란 두개의 축이 있는데 그것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유대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란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아 죽은 실패의 표적일 뿐이지 그들이 바라던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헬레니즘은 헬라인들의 사상으로 지금 온 세계의 교육과 사상의 바탕이 되는 철학입니다. 그들의 논리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신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도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대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병이 났고, 부자가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잘 해결이 되는 것이라면 아마 가난하고, 못 배우고, 약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문턱이 높다고들 하는데 만약 십자가가 세상이 볼 때에 지혜로운 모양이었다면 그 문턱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의 영광을 약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이 과연 십자가의 도, 즉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십자가를 증거 하여서 그런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에 초대교회 때의 구성원들을 보면 육체를 따라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믿음에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문벌이 좋은 사람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핍박받는 예수교 이단을 따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지혜나 재산이나 육체로 자랑한 만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말씀이 너무나 기분 나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정말 어느 누구라고 자기의 육체를 자랑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의요 거룩함이기에 그분만 자랑할 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증거 되는 성경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2. 세상의 모습에 대한 비유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십자가의 도가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온갖 포장을 해서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을 동원하든지 또는 선물을 주든지 해서 일단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복음만 전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과 건강이 보장되는 것처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라면 우리 역시 주님처럼 증거 해야만 하고, 주님이 받으신 대접을 우리 또한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들에게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습과 꼭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5-7)고 합니다. 사도들을 가두었다가 이튿날 재판을 하는데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들인 관원과 장로와 대제사장과 그 가문이 다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권세가 위태로워 질까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 한 질문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고 합니다. 이곳은 자신들의 허락 없이는 설 수 없는 곳인데 도대체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 나도 대답하겠노라고 하시며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라고 하면 왜 그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라고 하면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으니 백성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질문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스스로 말하는 자, 즉 나는 모태신앙이니, 개척멤버니, 목사니, 장로니, 권사니 하면서 이런 것들로 자신의 권위를 말하는 자들은 이들과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의 권세로 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역질문을 하시고는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고 하였을 때 큰 아들은 하고서는 가지 않았고, 작은 아들은 싫다고 하고서는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첫째 아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존경한다고 하나 마음으로는 자기 배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싫다고 하였으나 뉘우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의의 도를 전할 때 세리와 창기들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그들은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모퉁이 돌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이 모퉁이 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세를 받을 때가 되어 자기 종들을 보내니 세를 주기는커녕 잡아서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더 많은 종을 보냈는데도 똑같이 그렇게 대한 것입니다. 이제 주인이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리라 하여 자기 아들을 보냈음에도 그들이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고 하며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서 그 주인이 그 종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21:41)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대해 예수님께서 시편 118편 말씀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21:42)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자신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악한 농부들은 유대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죽이고 내어 쫓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의 주동자들이 바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권세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세를 배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으나 모두 다 박해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으나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버림받아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며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3. 모퉁이 돌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이런 세상은 진멸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이 땅의 주인이신 그분이 오셨건만 세상은 그분을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죄 된 모습이며 또 죄의 권세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 자신이 모퉁이 돌로 오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임에도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을 하나의 집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고, 좋은 친구도 필요하고, 배경 좋은 아내도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주변의 것들을 자기의 꿈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며, 만약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입니다.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나오고 헌금도 봉사도 하노라고 하지만 죽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며 지극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라 여기며 기다려 왔는데 끝까지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여야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버림받은 돌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이 증거 하는 것이 이 내용인 것입니다. 살기등등한 자들이 그들의 권세를 가지고 험악한 분위기로 몰아세우며 너희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너무도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부터 보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4:10-11)고 합니다. 너희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고 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일어났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하면서 그 죽으심을 시편 118편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린 돌이 이제 새로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이 되어 이제 새로운 집을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주의 백성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돌들로 집을 다시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어 새로운 집을 짓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버려진 모퉁이 돌에 붙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돌을 믿는 자가 과연 세상을 살아갈 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보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감옥에 가고, 잡혀서 매 맞고, 결국 대부분이 죽음에 넘기 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방법으로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받으신 대접과 같은 대접을 제자들이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예수를 잘 믿으면 현실적인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돌을, 우리도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린 그 돌을 우리가 지금 믿는다는 것은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다시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굳게 세우시고,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싸우는 신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세상이 돈으로 살고 돈을 자랑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의 권세를 자랑함으로써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퉁이 돌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벧전2:6)는 말씀처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알아 항상 주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자로 주만 바라보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통일교와 같은 이단들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세상의 지혜로 나타나는 두 축은 무엇이며, 그 지혜로는 왜 십자가가 미련한 것입니까?

3. 십자가의 도가 증거 되는 성경적인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4.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많이 왜곡되어 졌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이스라엘(세상)의 모습을 알게 하기 위해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와 뜻은 무엇입니까?

6.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7. 모퉁이 돌이 머릿돌이 되어 지어졌다는 의미와 그렇게 지어진 자들이 받을 대접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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