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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을 속이고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본문 / 행전 5: 1-11

 

 

1. 신자

신자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막연히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함을 인정해주는 수준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분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모습은 분명 달라져야만 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존재하시고 그들을 다스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막연한 분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했다또는 잘못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설사 잘못한 길을 간다고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전혀 간섭한 적이 없음을 경험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자신이 어려울 때 생각할 뿐, 불의함과 죄로 나아갈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며 또 이것은 결코 믿음의 바른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게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하며 또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머리이신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서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하면 이미 선입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헌금 떼어 먹다가 죽은 부부 이야기구나. 오늘도 헌금 강조 하겠구나하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들을 다 내려놓고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고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회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위협하고 협박하며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계속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다시 살아 나셨으며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선포를 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회개하고 모인 자들이 초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각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곧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인데 복음 안에서의 교제로 인하여 빨리 떠나지 못하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면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경비는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빠듯하게 마련하여 온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살 형편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넉넉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바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자기의 것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아마 아주 요긴하게 사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이 사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나바라는 뜻입니다. 이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절에 보면 위로의 아들이라고 하여 아주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이 바나바가 나중에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칭찬을 듣는 바나바를 보고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밭을 팔아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밭을 팔아 손에 목돈을 가지다 보니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돈보다 명예가 가치 있다고 생각되면 그 명예를 돈을 주고서라도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돈도 좋고 명예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돈의 일부를 감추어 두고서 밭을 판 전부인양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들 앞에 돈을 가져다 놓은 순간 베드로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주의 선포가 나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3)고 합니다. 그리고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5:4)하는 말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지내고 세 시간쯤 지났는데 그의 아내가 옵니다. 우리 남편도 사도들에게 좋은 칭찬을 받았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5:8)고 하며 삽비라에게 묻고, 삽비라는 이것뿐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미 부부간에 서로 합의가 된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그 아내도 알더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5:9)는 말을 하고, 이 말을 들은 삽비라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2.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쩨쩨하게 헌금 좀 떼먹었다고 부부를 다 죽여 버리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떼먹어도 죽기는커녕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잘 살아왔다는 경험으로 아무 일 없다고 안심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즉각 보응이 오지 않으니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하여 지는 것은 아닌지는 분명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건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아나니아가 헌금하였는데 그것도 상당한 액수를 하였는데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아나니아가 헌금하는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만큼 하니 나도 이만큼은 해야지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아나니아나 삽비라처럼 죽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는 말씀과 성령을 속였다는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먼저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는 말은, 밭을 팔기 전에도 아니니아의 것이었고, 팔고 나서 현금을 가졌을 때에도 아나니아의 것이었는데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재산을 우리 마음대로 처분이 됩니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마음대로 됩니까? 물론 확실하게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일이라면 이리 저리 처분을 하면서 재산을 불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돕는 일에 재산의 일부를 내어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 재산인데도 자기 마음대로 처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돈이라는 게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의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4:4-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의 제사를 당연히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아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왜 안색이 변하느냐고 책망하시면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죄가 가인보다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신에 을 대입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돈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리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지, 우리가 돈을 다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드리는 것은 어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모두도 돈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고 나자 한 성령을 받은 형제자매들 안에서 돈의 지배를 극복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돈의 권세를 이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의 신실한 백성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산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마저 기꺼이 형제를 위하여 내어 놓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관심사에만 관심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가득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성령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지금도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애통하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지 다 그런 거지, 우리는 어쩔 수 없다며 안심하고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제대로 알고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았다면 이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왜 즉각 죽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두는 것입니다. 혹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도 다칠까 하여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여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을 속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 번이나 성령을 속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속인 것이기에 우리의 신앙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주의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사람인 사도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친히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주님 앞에서냐, 아니냐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헌금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신학대학교의 교훈이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어떤 사람이 가 보았더니 책상마다 빽빽한 요점정리가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습장이 없어 그곳에서 공부하느라 그런 것을 아닐 테고 아마 시험 칠 때 커닝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물론 일부 신학대학에서는 시험 감독 없이 시험을 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라는 교훈을 갖고 있고 또 외우고 다닌다고 하여도 우리의 의식에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고 아나니아나 삽비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헌금을 합니다. 그러나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규칙을 정하지 아니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하는 말씀만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가 주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 눈치 보고, 다른 집사나 성도들 눈치 보고서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하는 것은 모두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이름 내기를 위하여 하는 것도 역시 주님을 믿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면 또 우리가 다 약하니 강조를 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과연 그런 것들을 누가 강조하였으며 또 누가 법으로 정하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14:23)고 하시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11:6)라고 하십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인색함으로 남의 눈치 보면서 경쟁하면서 한다면 벌써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순간 다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의 자세와 중심이 지금 주님께서 보신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뛰어 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적과 이적을 보고서도 모세가 40일간 보이지 않자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님 앞에서 하느냐 아니면 사람 앞에서 하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길이 갈려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는 어떻게 하더라 또는 안 하더라 하지 마시고 우리 모두가 지금도 살아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믿는 우리에게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만 나타나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 놓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바나바의 헌금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한 헌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돈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성령을 속였다라는 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것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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