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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의 능력

본문 / 27:57-66

 

 

 1. 능력

먼저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과연 능력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는 세상에서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살았지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고, 통장에 돈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우리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 믿음의 현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어리석은 것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복잡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교회에 출석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의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이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기분이 좋고, 세상에서 복잡한 일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그런 정도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교회가 내 감정과 기분에 의해 좌우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의 결단과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은혜라는 의미를 모르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조차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소중한 감사와 은혜의 기회를 한낱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 때문에 잃어버리고 산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걱정 때문에 은혜와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가난하고 메마른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만 웃고, 하는 일이 잘돼야만 웃는 그런 웃음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서는 그런 웃음이 아닌 세상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웃음, 주님 때문에 기분 좋은 웃음들이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과는 상관없이 어떤 일이 일어났든 주님은 죽지 않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그 믿음 때문에 여유 있게 웃어 보일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일 때문에 은혜를 잊어버릴 수도 있고, 감정에 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 자는 감정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우리의 감정이 믿음에 의해 다스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내 감정대로 움직여지는 자가 아니라 항상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의 힘 또는 신자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누구나 다 능력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신자들이 원하는 능력이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어떤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성령께서 능력을 가져다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내가 그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능력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치는 능력도 분명히 성령의 능력이라고는 말은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능력을 나에게 주었기에 이제부터 그 능력은 내가 발휘한다는 식으로 하면 결국 성령의 능력을 자기 소유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지만 나에게 주었기에 내가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자의 능력이란 단지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힘을 말씀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혹은 돈 많은 재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크나큰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능력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내 능력이 아닌 능력의 주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이 보여 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흔히 쓰는 '불가능이 없다' 또는 '하면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 없을 정도가 되어도 최후까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엄청난 능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정작 그 능력 안에 있는 신자가 그 능력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능력을 물리적인 힘이나 어떤 재주로 생각하는 버릇 때문인 것입니다.

 

 

2. 부활을 잊은 자와 막는 자

신자가 주님의 능력 안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뜻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뜻은 신자 된 우리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에 무슨 일을 맡기면 나는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변명을 늘어놓기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든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은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주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신앙 안에서는 그것이 어떤 일이든 모든 일에서 오직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든 그 맡은 자는 그 직분의 자리에서 교회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집사로서 또는 교사로서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줄 재간이 없기에 성령이 함께 하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약한 나의 모습을 고백하고, 주님이 함께 하사 십자가에 길에 동참하는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나를 통해 보여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 안에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주님만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능력 있는 신자가 점차 희박해져 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결국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죽으시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고,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단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심정은 믿었던 스승이 적들의 손에 의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소망도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지 예수님의 장사나 잘 지내줌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장사 지냈다는 것은 이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 즉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의지할 수도, 힘이 될 수도 없는 주님입니다. 그런 주님이 자기들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사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왜 신앙에 힘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허둥대고 낙심하는 모습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나의 이 문제가 다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를 알고,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있다면 주님이 지금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모습을 나에게서 보이시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신자라면 '지금 나의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가 진정으로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 안에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아예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부활을 막아보고자 애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막아보고자 무덤을 파수꾼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있던 세상 또 부활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겠습니까?

 

 

3. 참 능력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사흘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무덤에 계셨던 사흘의 기간은 세상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막으려고 했던 인간의 죄를 보여주는 기간입니다. 그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정복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과 능력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그 능력에 의해 우리의 죄가 정복되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하나하나 주님에 의해 정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로 끝나버리지 않고 그 죄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 내 죄가 정복되어지고 다스려짐으로 인해 이제는 내 삶의 모습에서 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신자라면 우리는 분명 이런 능력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는 못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만 보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못한다'는 생각 대신에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한다'는 것이나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 동일하게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힘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에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며, 우리의 능력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힘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도록 하기 위해 방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또 부활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일이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의 주님이 되사 그 능력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주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고, 세상에서 아주 작은 일을 가지고도 낙심하고 슬퍼하는 그런 인간임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성령으로 함께 하사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주님의 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그것만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 나오고, 주를 믿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모든 일들을 나의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기에 감사 대신에 자랑이 나오고, 겸손 대신에 교만이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해도 절대로 능력이라고 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살아계시는 주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버린 주님입니까? 우리들이 세상일에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한숨 쉬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주님은 단지 죽어 계시는 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단지 죽은 주님을 추모하고 있는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힘을 공급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걱정과 한숨보다는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능력으로 주님의 제자된 모습이 보여 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능력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의 능력으로 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능력은 부활의 주님을 잊어버리도록 합니다.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매여서 하늘의 소망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능력이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있느니라”(4:13) 고 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분명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합니다. 즉 주님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말씀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궁핍이나 풍부에서 항상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주님으로 인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천하다고 낙심하지 않고, 풍부하다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주님 안에서 이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공급되어 졌음을 알아 온전히 받아 누리며 살아감으로 범사에 그 공급자 되시는 우리 주님의 살아계심이 예원 가족들의 모든 삶 가운데 아름답게 선포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오늘 말씀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우리가 생각하는 신자의 능력에 대한 오해와 성경이 말씀하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4.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과 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5.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6. 예수님의 부활로 신자들은 어떤 자들이 되었다고 말씀합니까?

7. 세상의 것을 능력 삼으면 나타나는 증상과 하늘의 능력으로 사는 삶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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