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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본문 / 4:32-37

 

 

지난주에는 사도들의 기도를 보며 사도들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대주재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신들 또한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뿐임을 믿는 기도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증거 될 것인가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의 핍박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되어진 일임을 확신하기에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보다 더 크게 여기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믿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성령과 교회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기에 모인 것이라면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며 또 머리란 모든 지체인 교회를 주장하고 다스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의 몸이며 또한 성도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한 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고 합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 마다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받습니다. 성찬에서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을 말하고,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 한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그들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게 되자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라고 언급된 초대교회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 말세에는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신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신이 성령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나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확실하게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셔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버려진 모퉁이 돌로서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 자기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것도 나의 것, 네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의 믿음의 모습은 재물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기에 서로 나누는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재물을 나누자라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으니 아예 그렇게 할 생각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물건을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믿음이니까 이렇게 하자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서로 나누는 것은 믿음의 증거물(증상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들의 기도 다음에 재물을 나누는 것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고백하면서 오로지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은 재물에 대해서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되어 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되어지는 표적이고 기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참된 믿음의 기사며 표적이라면 이 믿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2. 가난한 자와 믿음

믿음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그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하고, 봉사한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부모와 이웃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부모도 공경해주고, 이웃도 사랑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부모를 공경하도록 할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할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3-35)는 이 말씀도 결국은 자기 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오고 또 그 가져온 것으로 사도들이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또 그 증거를 들은 무리들이 은혜를 얻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은혜가 있음으로서 자연히 되어지는 모습들인 것이지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 중에 가난한 자가 없는 것은, 있는 자들이 판 것을 가져오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있는 자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겼다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내어놓지 않음으로서 가난한 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난한 자는 우연하게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게 하신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있는 것을 팔라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믿음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한 것뿐입니다. 무슨 공동체 운동이나, 헌금을 강요하거나 또는 바치면 복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고 그러한 선포 앞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자기가 자기의 것을 확보해야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세계란 주고 또 주고서 죽을지라도 상관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내어 주셨지만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세계에서 살던 원리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들은 성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듣고 믿었기에 서로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한 몸이기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누가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는 명령은 오직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에게서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예수님의 은혜에 살아있고, 믿음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얻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명령한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들 곁에 가난한 자가 가난한 채로 지낸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고 내어놓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보내신 가난한 자가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를 바라볼 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초대교회가 한 것처럼 너희도 있는 것을 팔아서 나누라는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참 은혜와 거짓 믿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참 쉽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거의 모두가 개인적인 생각과 묵상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러한 고백도 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백에 대한 순종입니다. 은혜를 얻었다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고백했으면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드러내며 선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은 팔아서 그것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천국의 삶이요 성령이 임한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님께서 사셨기에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곡해하여 말씀에 은혜 받은 증거를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가르치면 곤란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1-9)고 합니다. 우리의 연보나 구제 그리고 형제 사랑이나 어떤 봉사도 결국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정신이고,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누가 누가 잘했나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긍휼을 입고 나온 자들이기에 한 형제요, 한 몸이요, 한 뜻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한 뜻이란 한 영혼으로 번역이 됩니다. 다 한 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믿음이 신자를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가를 명심하면서 날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 경계하고 고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우리 소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주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으로 그쳐 버립니다. 즉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의 증가로 여기면서 소유를 증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자로서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미약할 뿐입니다. 결코 자신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며 자랑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또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결코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우리이고, 몇 십 년을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역시 내 것에 대한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면서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어리석은 자의 실상인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쌓고,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할 것이 없는 인생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고, 믿음에 대한 문제 역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기도할 것도 없는 신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며 사는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연약한 자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처럼 하라고 해도 할 자신도 없고 또 그렇게 할 마음도 없는 자가 곧 우리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를 말하고, 성경을 말했지만 적당한 수준까지 순종하는 척하고는 더 이상 깊이 들어가기는 거부해 버리는 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끝까지 내 것은 지키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않는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들었던 우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늘 말씀 앞에서 재물에 대해서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주님 보시기에 주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예원 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과 믿는 우리와의 관계를 무엇이라 하며,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2.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나타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나타난 모습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성경의 뜻은 무엇입니까?

4.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가난한 자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우리들의 잘못된 이해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7.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리가 아름다운 우리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무엇이며 또 우리의 실상을 알 때 할 수밖에 없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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