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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증거하러 온 자

본문 / 1: 6- 8

 

1. 만유의 아버지

사람은 하나님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힐 수 없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유라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5-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 즉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말합니다. 만유를 통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만유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만유란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만유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비록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친다고 해도 그도 결국 만유 안의 한 일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 결국 만유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피조물다움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겸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유의 아버지라 말하고, 우리 역시 만유에 포함된 피조물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의 존재 이유 또한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태어남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존재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삶의 목적 역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그 자리를 꿰차고 자기만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유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존재하며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만유 안에 사람으로 지음받은 우리 역시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시고 그분의 뜻이 있었기에 우리가 숨을 쉬며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항상 마음을 두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유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은 것은 오직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입니까? 다른 만유에 비해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 보면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고 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다스리는데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 대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로 지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의 모습, 즉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운행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 따 먹으면서 사람에게서 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져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지면 사람은 다만 흙일 뿐입니다. 이처럼 흙에 지나지 않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잃어버린 생명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다시 생명이 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창조 때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포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시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함이나 선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2. 생명 있는 신자의 삶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6-8)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요한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요한을 우리가 하는 표현처럼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단지 태어났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보냄을 입었다고 표현한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냄을 입었다는 것은 보낸 분이 있다는 뜻이고, 보내신 분이 있다면 왜 보내셨는가를 묻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생일이라는 것도 단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파견한 날로 기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삶의 의미는 빛 되시는 분을 증거 하는 것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과연 요한에게만 국한된 것이겠습니까? 요한이 보냄을 입었다면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지는 요한의 존재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존재 이유가 빛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셨다면 그 이유도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왜 이것을 주셨는가?’라는 물음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도구로 주신 것이다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셨다는 것을 굳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고난과 어려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수도 있고 어려움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도 고난과 어려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빛이란 어둠에 있는 자를 인도하는 인도자입니다. 따라서 어둠이란 길을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생명의 길을 모르는 것이 곧 어둠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빛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것은 생명의 길이 무엇임을 증거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부요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부요함에 빠져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확인시켜 주는 삶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부요하게 하신 것도 돈이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부요라는 환경에서 증거하라는 이유인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진다면 그것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라는 환경에서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 염려하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됨을 결코 증거되지 못합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가 생명 됨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신자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빛에 대하여 증거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 흔적은 삶에서 묻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사단과 예수님의 다른 점입니다. 사단에게 있어서 생명은 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양식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떡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라면 신자에게서 증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부담이 되고 어려운 말이지만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삶이 빛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떡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전락한다면 결국 우리 역시 어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역할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은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요한이 높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뒤의 27절에 보면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27)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한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내 손가락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증거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따라서 들을 귀가 있는 자라면 요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가리키는 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자의 역할은 다만 빛을 제대로 가리키는 것뿐입니다. 빛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달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달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할 때 결국 소경된 자가 소경을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주의하고 지금 우리가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역할, 즉 달을 제대로 가리키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증거자인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이 빛 되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증거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삶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자는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지 우리가 높아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리키기에 열심인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에서 나타나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살아가고, 세상에 보냄받은 이유를 아는 신자라면 어둠에서 빛을 보게 될 것이고 빛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부담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될 것이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안타까워하며 살아갈 사람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복을 받았다면 남을 위해서 주어진 복이며, 고생을 한다면 그것 역시 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만을 보고 산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흔적들만 잔뜩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의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남겨지는 흔적들이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깊이 묵상하시며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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